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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U블럭 2014. 3. 2. 14:47

 

 

 

“산창에 기대 서니 밤 기운이 차가워라.

매화 핀 가지 끝에 달 올라 둥그렇다.

봄바람 청해 뭐하리. 가득할손 청향일다.”

-이황, ‘달밤에 매화를 읊다’-

 

매화를 무척 사랑했던 이황의 시다.

매화꽃 활짝 핀 차가운 겨울 밤의 정경이 눈에 잡히는 듯하다.

이 시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아마 어몽룡의 <월매도>가 제격일 것이다.

 

      1)어몽룡,<월매도>, 비단에 먹, 119.2 × 53cm, 국립중앙박물관

 

어몽룡(魚夢龍:1566-1617)은 ‘매화를 잘 그리기로 조선의 제일’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는 여러 점의 매화도를 남겼는데 특히 <월매도>는 그런 평가를 확인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윗부분이 부러진 늙은 나무와 시원하게 하늘로 뻗은 마들가리가 조화롭게 배치된 <월매도>.

늙은 나무는 그다지 굵거나 괴이하지 않아 고목으로 평가받기에는 부족하다.

그 단점을 비백으로 벗어나고 있다.

나무의 몸체를 가운데가 텅 비도록 붓질하여 고목이 겪어낸 만만찮은 세월을 채워 넣은 것이다.

서예에서 자주 쓰는 비백체는 붓을 잡은 자의 응축된 힘을 느낄 수 있는 서법이다.

그래서 굵지 않은 마디 속에는 옹골차게 견뎌온 세월이 담겨 있다.

 

부러진 나무는 더 이상 위로 뻗지 않는다. 대신 새로 자란 줄기는 원목을 대신하여 하늘로 향한다.

거침 없이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줄기를 따라 끝으로

시선을 옮기다보면 그 곳에 둥그스름한 달이 떠 있다.

갑자기 하늘의 전설이 매화꽃 위로 소금처럼 뿌려질 것 같다.

꽃과 달과 시를 함께 표현할 수 있었던 어몽룡은 그래서 행복한 화가이다.

 

추위를 뚫고 나와 꽃을 피우는 매화는 그 강인함과 고고함으로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다.

그래서 조선 중기의 문신 신흠(申欽:1566-1628)은 매화를 가르켜

 ‘매화는 일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찬탄했다.

차가운 겨울 달빛 아래서 흘러 넘치는 ‘청향’. 그것은 세속에 초월한 군자의 성정에서

풍기는 고결함과 인품을 의미할 것이다.

그 인품은 그림 속의 달이 초생달이나 반달이 아니고 완전한 보름달이듯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

차가운 겨울 달빛 아래 꽃을 피우는 매화같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몽룡의 <월매도>는 군자의 도리라는 이념을 시각화한 작품이며,

자연물을 통해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배우라는 메시지이다.

 

 

<조속과 심사정>

 

어몽룡은 <월매도>에서 매화의 상징성과 시적 운치를 표현했다.

그런데 후대의 화가들은 매화의 아름다움에 새를 추가했다.

꽃과 새는 자연을 떠올릴 때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어몽룡보다 30여년 뒤에 태어난 조속(趙涑:1595-1668)

<매작도>에서 매화와 까치를 결합했다.

 

      2)조속, <고매서작>, 종이에 먹, 100 × 55.5cm, 간송미술관

 

   3)조지운, <매상숙조도>, 17세기, 족자, 종이에 먹, 109×56.3cm, 국립중앙박물관

 

예로부터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는 까치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새다.

그래서 기쁨을 알리는 ‘희조(喜鳥)’다. 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피어난 매화 가지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어렵다고 피해가지 말고, 두렵다고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자신을 믿고 나가다보면

결국에는 자신만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다.

조속의 <매작도>가 청정한 기운을 내뿜는 것은 고매했던 그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성공했지만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가난한 삶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림과 인생이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속의 아들 조지운(趙之耘:1637-1691)도 아버지처럼 매화 그림을 잘 그렸다.

매화 위에서 졸고 새와 물가에서 날아오르는 새 등 독특한 개성이 느껴지는 화조화를 남겼다.

특히 <매상숙조도>는 공간을 구성하는 뛰어난 능력과 그림을 읽는 맛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졸고 있는 새를 그린 <숙조도(宿鳥圖)>는 어떤 모본이 있었던 듯

여러 작가들이 비슷비슷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조지운의 작품은 <숙조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반원을 그리고 가로지르는 매화가지 위에서 날갯죽지에 고개를 묻고 잠자는 새.

그 위 아래로 진한 먹으로 그린 대나무가 졸고 있는 새를 감싸듯이 뻗어 있다.

진한 먹과 엷은 먹의 대조 못지 않게 위쪽을 향해 뻗은 매화가지도 그의 치밀한 구성력을 말해준다.

무심히 그려 넣은 듯한 작은 매화가지로 인해 화면이 안정감을 얻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가지끝을 따라가다보면 맨 위쪽의 관서(款署)에 이르지 않는가.

 

 

      4)심사정, <딱따구리>, 비단에 색, 25×18cm, 개인장

 

매화와 새를 결합해서 그린 작품으로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딱따구리>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은 딱따구리와 매화를 그렸으면서 매화도 살고 딱따구리도 살린 수작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딱따구리면서 매화이다.

딱따구리는 ‘탁목조(啄木鳥)’라 불린다. ‘나무를 쪼는 새’라는 뜻이다.

탁목조가 부리로 거칠게 쪼아대는 바람에 붉은 매화꽃 한 송이가 떨어지고 있다.

저 작은 새가 바늘같은 부리로 쪼아댄다한들 설마 꽃이 떨어지겠는가,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딱따구리가 늙은 나무를 쪼아대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온 몸을 망치처럼 세차게 흔들며 쪼아댄다.

그 모습을 보고나면 딱따구리의 머리와 배에 칠해진 붉은 색이 예사로 안보인다.

심한 노동으로 벌겋게 상기된 것처럼 보인다.

 

심사정은 역적의 후손이었다.

그런 태생적인 신분 때문에 양반이면서도 평생 벼슬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그림에 전념하여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었다.

딱따구리는 끝없이 나무를 쪼아 딱딱한 나무에 구멍을 뚫어 먹이를 찾는다.

심사정 또한 쉬임 없는 붓질을 멈추지 않아 대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대가의 붓질에서 나온 작품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윤제홍과 김수철의 고매한 매화>

 

『花品』이란 책을 지은 북송대의 장공보(張功甫)는 매화와 가장 잘 어울리는 항목을 26개로 뽑았다.

엷은 그늘, 새벽 햇살, 가벼운 추위, 가는 비, 엷은 안개,

아름다운 달, 석양, 싸락 눈, 오후의 노을, 진귀한 새, 외로운 학,

맑은 시내, 작은 다리, 대나무, 소나무 아래, 밝은 창, 성긴 울타리,

깎아지른 절벽, 푸른 이끼, 구리 주전자, 종이 장막, 숲 속의 피리소리,

무릎 위의 거문고, 넓적한 바위 위의 바둑판, 눈을 모아 차를 끓임. 미인의 엷은 화장과 장식 등이다.

 

          5)윤제홍, <석매>, 종이에 먹, 25×48cm, 개인장

 

운제홍(尹濟弘:1764-?)의 <석매(石梅)를 보면 장공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음을 알 수 있다. 가벼운 추위, 깎아지른 절벽, 외로운 학, 구리 주전자...

그는 당장 붓을 들어 장공보의 말을 시각화했다.

깎아지른 절벽 대신 괴석을 그리고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 책상을 펼쳤다.

매화는 지금까지 많은 선배들이 그랬듯 상체가 잘린 늙은 나무에서 새 줄기가 나와

화사한 꽃망울을 터트렸다.

화분같은 괴석과 매화를 같은 톤의 먹으로 그리다보니 괴석이 마치 늙은 매화둥치같다.

책상 위에는 차 끓이는 주전자와 책과 필기구를 놓았다.

그 곁에 고개를 돌린 학 한 마리는 ‘매처학자(梅妻學者)’인 임포(林逋)의 고사를 생각하며 그린 것이다.

이 정도로 그렸으니 굳이 임포를 그려 넣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잠시 후면 이 곳 숲속에서 피리소리가 들리든지 아니면 거문고 뜯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학산(鶴山) 윤제홍은 29세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상황에 연루되어 유배와 복직을 되풀이하면서 우울한 생애를 보내야만 했다.

<난>과 함께 그린 <석매>의 제시 끝에서 그는 자신의 불우했던 심정을 이렇게 위로하고 있다.

“...촘촘히 박힌 별과 달은 높기만 하고, 푸르고 아득한 곳에 운무가 떠다니네.

크도다! 하늘과 땅 가운데 우리의 도는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거듭되는 삭탈관직으로 불운한 생애를 보내야 했던 윤제홍.

그의 지향처가 임포처럼 세속을 벗어나 매처학자가 되는 것이었다는 듯

<석매>는 고결한 선비의 기품과 자존심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6)김수철, <석매>, 종이에 엷은 먹, 51.8×28cm 개인장

 

윤제홍의 자유로운 화풍의 매화도는 조선 말기의 화가인

김수철(金秀哲:1800이후-1862이후)에게 이어진다.

수채화같은 담백한 화풍을 선보인 김수철은 당시 화단에서 개성적인 화가였다.

그가 그린 <석매>속에는 윤제홍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다만 두 사람의 필법과 개성이 워낙 달라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윤제홍이 장공보의『花品』에서 영감을 얻었듯이 김수철은 윤제홍의 <석매>를 보고 무릎을 쳤다.

 

구멍 뚫린 괴석을 배경으로 매화를 배치하는 법. 괴석의 테두리를 선으로

그리고 안쪽을 담채로 물들이는 법. 줄기에 비해 유난히 크고 넓은 매화꽃잎 등

윤제홍의 작품은 김수철이 매화를 그리는데 참고서가 되었다.

다만 윤제홍이 좀 더 자세하고 친절하게 은거하는 선비의 즐거움을 묘사했다면

김수철은 빠르고 경쾌한 붓질로 생략과 단순화를 선택했다.

 

화제로 적은 ‘쇠나 돌처럼 굳은 마음(鐵石心腸)은 매화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 화제가 어몽룡의 <월매도>라면 모를까,

감각적이고 세련된 화풍의 김수철 작품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아니라면 세련된 붓질의 작가에게는 결연한 의지조차도 세련되게 표현되는 걸까.

아무튼 윤제홍과 김수철의 매화도에 이르러 매화는 매화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비록 작가들이 매화에 담긴 의미와 상징을 의식하며 붓을 들었다 할 지라도

그들의 그림은 이미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은 조희룡의 매화꽃밭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조희룡과 장승업>

 

옛 문인들이 최고로 친 매화꽃은 어떤 꽃이었을까.

최고로 아름다운 꽃은 네 가지 조건을 갖춘 꽃이었다. 첫째는 꽃이 ‘드물어야(稀)’ 한다.

꽃과 줄기와 가지가 산만하게 얽혀 번잡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늙은 나무일수록(老)’ 가치가 높았다.

고목이 되어 더 이상 생산이 어려울 듯 싶은 나무에서 여린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늙어서 퍼석거리는 내 몸의 겨드랑이가 터져나오는 봄기운으로 근질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매화는 회춘을 상징한다.

매화를 젊은 사람보다 늙수그레한 선비들이 좋아했던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세 번째 조건은 ‘가지가 마르고 야위어야(瘦)’ 한다는 것이다.

매화꽃은 작고 여리다. 모란이나 부용꽃처럼 넓고 화려하지 못하다.

이런 꽃을 달고 있는 가지가 굵직하다면 꽃이 묻히고 말 것이다.

늙은 나무는 비대해도 넉넉해보인다.

구불구불하고 괴상하게 생겨도 세월의 연륜이 묻어 있어 아름답게 보인다.

그렇다고 줄기와 가지까지 늙은 나무를 닮아서는 안된다.

한창 일 할 나이에는 몸이 잽싸야 한다.

가야 할 길이 구 만리같은 새파란 젊은이가 영감 흉내를 내서야 되겠는가.

늙은 할애비 곁에는 뒤뚱거리며 걷는 어린 손자가 제격이다.

꽃을 피워내야 하는 가지와 줄기는 마르고 야위어야 한다.

 

최고의 꽃이 되는 네 번째 조건은 ‘꽃 봉오리진(?)’ 상태여야 한다.

독수리는 날기 직전 웅크리고 있을 때 가장 힘이 있어 보인다.

출발 직전 마라토너의 긴장감. 터지기 직전의 달궈진 튀밥통. 뙤약볕 아래를 걷다가

폭포수에 뛰어들기 전의 설레임. 꽃 봉오리진 매화를 보면

그런 기대와 긴장감과 설레임이 되살아날 것이다.

 

   7)조희룡, <홍매대련>, 종이에 엷은 먹, 각127×30.2cm, 개인장

 

 

이 네 가지 심사를 가볍게 통과해버린 작품이 조희룡의 <홍매대련>이다.

조희룡(趙熙龍:1789-1866)은 매화라면 정신을 못차렸던 사람이다.

그러니만큼 매화 그림도 상당히 많이 남겼다.

그에게 매화는 더 이상 지조나 절개의 상징이 아니었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서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청덕(淸德)의 화신도 아니었다.

매화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이었다.

조희룡은 매화를 짓누르고 있는 힘겨운 상징성을 전부 털어버렸다.

 

조희룡은 남종문인화의 대가인 김정희의 제자이면서도 스승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글씨와 그림에서 가슴 속의 뜻도 좋지만 손재주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승을 무척 존경했지만 자신의 개성을 희생할만큼 줏대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매화 자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만 몰입했다.

매화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 ‘미친 듯이 칠하고 어지럽게 긋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그의 매화도가 유난히 굴곡이 심하고 과장적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홍매도>에는 매화꽃이 ‘은하수처럼 쏟아 내린 별무늬’가 박혀 있는 듯하다.

장식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는 백매화보다 홍매화가 제격일 것이다.

조희룡 이후 홍매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8)장승업, <홍백매 10폭 병풍>, 종이에 엷은 먹, 90×433.5cm, 호암미술관

 

이런 시대적인 바탕 위에서 장승업(張承業:1843-?)의 <홍백매병풍>이 탄생할 수 있었다.

10폭 병풍을 온통 홍매와 백매로 가득 채운 이 작품은 장식성의 극치이다.

조선의 화가중 ‘기량 제일’을 자랑하는 장승업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힘이 넘치면서도 산만하지 않다.

매화 가지가 꺾이는 각도나 방향이 심하게 과장적이지만 자연스럽다.

이런 형식의 장식적이면서 화려한 병풍이 당시에 꽤 유행했던 듯하다.

유숙(劉淑:1827-1873)과 허련(許鍊:1808-1793)도 비슷한 형식의 병풍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런 경향은 이제 더 이상 매화가 관조의 대상이나 관념의 투영이 아님을 반영한다.

꽃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 충분히 그림의 화제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신분과 계급을 떠나 사람 자체만으로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라는 의식과도 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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