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만지는 시계

U블럭 2016. 5. 1. 07:01

모두를 위한 시계 개발한 김형수 이원 타임피스 대표

2011년 미국 MIT 경영대학원생 김형수 이원 타임피스 대표는 시각장애인이 정말 필요로 하는 시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시각장애인만의 ‘특별한’ 니즈에 집중했다. 하지만 특별함은 없었다. 단지 “시력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은 그는 마침내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계가 아닌 ‘모두’를 위한 시계,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개발했다.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촉감’ 시계다. 두 개의 작은 구슬이 각각 시침과 분침을 대신해 돌며 시간을 표시하는데, 시각장애가 없는 사람은 눈으로 시간을 볼 수 있고,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은 손끝으로 만져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독특한 시계는 등장하자마자 세상의 눈을 사로잡았다. 세계적인 디자인상을 휩쓸었고, 전 세계 패션 피플의 관심이 집중됐다. 시각장애인이며 미국의 전설적인 팝 아티스트 스티비 원더가 사랑하는 시계라는 수식어도 생겼다.

“비시각장애인들이 저희 시계를 사용하며 자연스럽게 시각장애인의 경험을 공유하게 되고, 이것이 ‘다름’에 대한 생각의 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는 김형수 대표. 미국 워싱턴DC에 사는 그와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허무는 생각’ 에 대해 이메일로 이야기를 나눴다.


시각장애인이 정말 원하는 것

시작은 작은 ‘관심’이었다. 경영대학원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친구는 수업 중 자주 그에게 시간을 물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두세 번 반복되자 조금 귀찮은 생각이 들었고, 그제야 친구를 유심히 살펴본 김형수 대표는 그의 손목에서 디지털 시계를 발견했다. 버튼을 누르면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이 있으니 사용하면 될 것을 굳이 물어보는 이유는 뭘까. 친구는 “내가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게 정말 싫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능을 정작 시각장애 당사자들은 사용을 꺼리고 있었다.

“정말 놀랐어요.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인이 원하는 제대로 된 시계 하나가 없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죠.”
김형수 대표와 ‘미국의 영웅’ 브래들리 스나이더 그리고 그의 안내견 Gizzy.

전자제품에서 버튼이 사라지고 터치패널이 보편화되면서 시각장애인들의 일상은 더 불편해졌다는 사실을 그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실제로 미국의 많은 시각장애인들은 버튼과 손잡이가 있는 옛날 제품을 구하기 위해 중고 상점을 찾지만, 이마저도 갈수록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는 MIT 공과대학에 재학 중인 친구들을 모아 직접 개발에 나섰다. 5개월 후 4개의 점자로 구성된 시제품이 완성됐고, 그는 제일 먼저 보스턴의 시각장애인 단체를 찾았다. 하지만 좋은 반응을 기대했던 그날, 정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발표 후 한 분이 ‘우리 중에 몇 명이 점자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고 질문하셨어요. 당연히 ‘대부분’이라고 말했죠. 그러자 ‘시각장애인 10명 중 2~3명만이 점자를 읽을 수 있다’고 알려주시더군요. 또 다른 분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비시각장애인과) 구분되지 않는 것’이라고도 하셨어요. 5개월의 시간과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거죠.”

하지만 충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시각장애인들이 너도나도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이즈는 어때요?’ ‘큰 시계는 안 예뻐요’ ‘색상은 어떤 종류가 있죠?’ ‘나는 밝은색을 좋아해요’ 등 디자인에 대한 다양한 요구들 앞에서 그는 말없이 땀만 흘렸다. 필요한 것은 시각장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기능뿐이라고 생각했다.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은 누구나 멋져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었다는 게 몹시 부끄러웠다.


브래들리 스토리, 메시지를 담다
개발과정에서 시각장애인들과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었던 프로토타입(시제품). 촉감으로, 또 시각으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외곽의 구슬은 시간을, 중앙의 구슬은 분을 표시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목표는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시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회사 이름도 모두(everyone)라는 뜻을 담아 이원(EONE)으로 정했다. 개발 과정에는 시각장애인들도 참여했다. 콘셉트 스케치만으로는 서로 소통이 어려워 아이디어를 수정할 때마다 새로 시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컸다. 하지만 시각장애인과 비시각장애인이 함께 생각과 경험을 공감하는 시간은 고스란히 아이디어로 반영됐다.

“촉감으로 시간을 확인하는 기능은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회의 중에, 또는 데이트할 때 몰래 시간을 확인해야 하는 상황은 흔한 경험 중 하나니까요. 우리가 원한 건 시력과 상관없이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고, 또 갖고 싶을 만큼 멋진 디자인의 시계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시계를 본다는 의미의 ‘워치(watch)’ 대신 ‘타임피스(timepiece)’ 라고 부릅니다.”

결과는 좋았다. 손으로 만지는 특성상 내구성을 위해 사용한 티타늄 소재는 심플한 디자인과 어우러져 고급스러웠고, 세련된 색상은 패션에 민감한 젊은 층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숙제가 남아 있었다.

“시각장애인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며 생각했죠. 시계를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시각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평소 벽이 있는 두 그룹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비시각장애인들의 관심이 필요해요. 저는 비시각장애인에게 영감을 주는 스토리를 통해 사회적 이슈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시각장애가 없는 사람은 눈으로 시간을 볼 수 있고,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은 손끝으로 만져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를 찾는 그의 눈에 브래들리 스나이더의 기사가 들어왔다. 브래들리 스나이더는 201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군 복무 중 폭탄을 제거하다 시력을 잃고, 전역 후 1년 만에 런던 장애인올림픽 수영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미국의 영웅적 인물이다.

꼭 만나고 싶었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어느 날, 경영대학원의 한 동기가 “군에서 시력을 잃은 친구가 너희가 디자인 중인 시계를 한 번 사용해보고 싶어 한다”며 연락해 왔다. 그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고, 얼마 후 믿기 힘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바로 브래들리 스나이더였다.

“우리는 전화 통화를 하며 바로 의기투합했습니다. 직접 만난 브래들리 스나이더는 정말 놀라웠어요. 낮에는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마라톤 연습을 하고, 가끔 친구들과 바(bar)에서 어울리며 TV를 시청하는 멋진 일상을 보내고 있더군요.”

‘브래들리’. 새 브랜드로 이보다 적합한 이름은 없었다. 브래들리 스나이더는 적극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실제로 그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올 블랙 에디션’은 현재 이원 타임피스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다.

2013년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미국의 크라우드 펀딩사 킥스타터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김형수 대표는 크라우드 펀딩이야말로 브래들리 타임피스의 타깃 고객층, 즉 새로운 아이디어・디자인・독특한 철학에 관심을 갖는 젊은 층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 확신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목표 금액 4만 달러를 6시간 만에 달성했고, 총 60만 달러의 펀딩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여세를 몰아 디자인・패션 커뮤니티를 적극적으로 공략해 나갔다. 런던 디자인 박물관이 선정하는 ‘올해의 디자인(2014)’ 선정을 시작으로 iF Design Award, Red Dot Design Award 등 세계적인 디자인상도 수상했다.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디자인한 제품이 주류(mainstream) 시장에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원 타임피스는 ‘더’ 좋은 디자인에 대한 뚜렷한 원칙을 갖고 있다.

“좋은 디자인은 편리한 사용을 위한 기능적 요소를 갖춰야 하죠. 요즘에는 미학적으로 아주 특별해 특정 계층이 소비할 수 있는 디자인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원이 생각하는 ‘더’ 좋은 디자인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경험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을 넘어 다른 신체 장애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디자인을 고민 중인 그가 선보일 다음 ‘스토리’가 궁금하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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