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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 너무 길어서 읽는데 엄청 시간 걸리는데 다 읽었다
황우석 사태에 대하여 정리해주실분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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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사태는 사기극이다 황우석 교수는 천재이며 그의 줄기세포 논문은 아인슈타인이 환생해도 풀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을 뛰어넘는 과학자다 대충 이런 뉘앙스)
PD수첩 측에서는 이 논문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디 못해 돈으로 관심사를 옮겼는데 우리나라에 돈 문제 털어서 깨끗한사람 있겠냐
라고 하셨는데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니 굳이 비유하자면 파스퇴르나 다윈 정도를 넘는 천재라고 비유하신거 같고 세계에 논문의 진실성을 풀 인재가 없다고 하신거 같은데 대충 사건의 전말과 결과는 알지만 언론에 치우친 발언이 아는 과학적 소견을 들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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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oo****님 답변입니다.
친구- 채택답변수45
- 2012.07.03. 11:07
파스퇴르나 다윈정도를 넘는 천재라고 하기엔 그렇고요.. 우리나라 ntES Cell(인간배아복제줄기세포)에 관해서 최전방에서 연구를 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노벨상급의 훌륭한 연구결과를 내는데에는 실패했지만요..밑에는 황우석사태에대해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글을 퍼왔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희대의 사기꾼일까요? 아니면 안타깝게 희생된 영웅일까요?제가 비록 지금은 기자로 일하고 있지만, 한때는 수의사였던지라 주변에선 황우석 박사에 대해 많이 물어보시곤 했습니다. 일부 시청자들께선 제게 메일을 보내 당신의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황 박사를 둘러싼 이야기의 전말이 몹시 궁금했습니다.사실,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논문이나 언론보도를 접하지 않고서 특정 연구에 대해 자세히 하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그만큼 연구라는 작업은 복잡하고, 은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황우석 연구팀에 대한 논문과 언론보도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또, 연구팀에 몸담았던 선배들을 만나고, 직·간접적으로 황우석 연구팀에 대한 이야기와 정보를 접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 자르듯 딱 잘라 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100% 진실 혹은 100% 거짓이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황우석 박사를 둘러싼 논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아직 관련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이고, 여론도 여전히 찬반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전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줄기세포 사업이 시들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던 지난 16일,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대에서 열린 '줄기세포 연구개발(R&D) 활성화 및 산업경쟁력 확보 방안 보고회'에서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단순히 검토가 아니라 신속하게 대처하겠다. 내년도 R&D 예산에 (줄기세포 연구 지원이) 반영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 과감하게 해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라디오 연설에서 등에서도 수차례 줄기세포에 대한 지원의지를 밝혔습니다. 이런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황우석 박사도 5년 반 만에 언론과의 인터뷰를 갖고 자신의 심경을 밝히기도 했습니다.황우석 박사 파동이 이후,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요? 더 성숙하고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더 배우고 더 반성해야 할까요? 황우석 박사 사태는 과학기술이 국민과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되는 의미와 그 과정에서 겪는 혼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과학과 정치와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또 동시에 과학이 사회적 주목을 받기 위해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은 유명해질수록 신화가 따라붙게 됩니다. 과학자도 마찬가집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로, 뉴턴은 '사과나무'로 신화를 얻었습니다. 신화들은 과학자의 천재성, 성과의 위대함 같은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범인은 흉내 내기도 어려운 ‘영웅’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황우석 박사도 사회적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에 걸맞은 신화가 주어졌습니다. 바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연구에 헌신한 과학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과학자들의 신화가 순전히 없는 사실을 거짓말로 지어낸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황우석 박사에게 주어진 신화도 전부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과장됐거나 부풀려졌다면 사람들은 신화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것이 사실 그대로이면 사람들에게 주는 감동이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과학자의 신화에는 언제나 딱딱한 과학적 사실과 더불어 그것을 돋보이게 만드는 수사학적 표현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황우석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에게 입혀진 신화를 살짝 걷어내고, 그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황 박사를 비난하거나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앞으로 이런 혼란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건 작게는 황우석 개인이 걸어온 길에 대한, 크게는 과학과 정치의 관계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한 성찰일 것입니다. 부족했던 부분은 부족한 대로, 잘된 부분은 잘된 대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황우석 박사가 걸어온 길 황 박사는 줄기세포 연구로 가장 유명해졌지만, 실제 연구했던 분야는 동물복제와 이종장기 등 다방면에서 연구를 진행해 왔습니다. 황 박사의 전공은 동물의 번식을 다루는 '산과학'이었습니다. 주로 대표적인 산업 동물인 젖소를 대상으로 임신진단, 정자 관리, 번식장애 등에 연구를 했습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도 난소호르몬에는 발정을 촉진하고 억제하는 호르몬 '에스트라이올'과 '프로게스테론'의 작동기작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이들 호르몬이 자궁과 세포질과 핵 사이를 오가며 서로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밝힌 논문이었습니다. 당시 이 논문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우수한 논문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하지만 황 박사가 연구해온 인공수정과 가축번식 분야는 첨단 학문 분야가 아니라 당장 유용하게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연구였습니다. 이는 황 박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황 박사는 순수한 학문적인 목적보다 실용화할 수 있는 연구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국가와 민족의 내일을 위한 연구를 하겠다는 얘기를 많이 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인 얘기지만 결국 이런 관심이 훗날 화의 근원이 되기도 했습니다.1982년 박사학위를 받은 황 박사는 서울대 수의대 교수에 지원을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임용에서 떨어진 황 박사는 일본의 명문대학 홋카이도대학에 연구원으로 갔습니다. 황우석이 들어간 곳은 동물 수정란 연구로 유명한 ‘가나가와 히로시’ 연구실이었습니다. 연구 책임자인 가나가와 박사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발생학을 공부한 학자로, 배아를 미세조작기로 정교하게 분할해 그 분할된 배아가 새로운 개체로 발생하게 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가나가와 연구실은 전통적인 인공수정 단계를 넘어 수정란 이식, 수정란 분할복제까지 연구를 확장하고 있는, 동물 번식에 있어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력을 자랑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황 박사는 국제적인 연구 동향에 눈을 떴습니다. 이 연구실에서 수정란 연구에 중요한 수정란 동결법과 미세분할 연구 등을 충실하게 배웠습니다. 또, 초기 발생 단계의 수정란을 정교하게 분할하는, 선진국에서도 처음 시도되는 미세조작기술까지 모두 익혔습니다. 황 박사는 가나가와 연구실에서 익힌 기법을 발전시켜 훗날 현미경에 장착된 미세조작기를 사용하는 이른바 '젓가락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이로서 현미경 아래에서 미세유리바늘과 마이크로 피펫을 가지고 수정란이나 난자를 정밀하게 분할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동물 번식기술은 난자와 수정란을 좀 더 정교하게 다루는 방식으로 진화했습니다. 인공수정이 단순히 정자를 암컷의 생식기에 주입하는 것이라면, 수정란 이식은 우수한 유전형질을 지닌 암컷을 품종 개량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등장한 체외수정은 우량 암컷을 과배란 시킨 뒤 수컷의 정자를 주입해, 암컷 체내에서 다수의 수정란이 만들어지도록 했습니다. 이 우수 수정란을 채취해 곧바로 다른 대리모에게 분산 이식해 우수한 동물을 여러 마리 얻을 수 있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도 이런 연구 분야를 차례로 거치며 발전해 왔습니다. 황우석은 1986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 후 본격적으로 수정란 이식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젖소의 수정란을 미리 적절히 탈수한 후에 급속 동결 시켜 성공적인 연구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 뒤 1990년까지 인위적으로 쌍둥이 송아지 생산을 늘리는 방식으로 생산성 증가를 시도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쌍둥이 송아지 수태율이 1~5%에 불과하지만 이분할 수정란 이식, 과배란 유도 후 인공수정, 인공수정 후 수정란 이식하는 방법을 통해 쌍둥이 임신율을 21.4%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이로써 홋카이도에서 배운 새로운 연구 방향, 수정란 이식 연구를 완성한 셈입니다. 물론 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연구였지만, 아직 난자나 수정란을 정교하게 조작하는 단계는 아니었습니다. 황우석 박사가 다음으로 추진한 연구는 '체외수정'이었습니다. 체외수정 연구는 1978년 영국에서 패트릭 스텝토와 로버트 에드워즈가 시험관 아기 '루이즈 브라운'를 탄생시키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선 1985년 서울대 의대 장윤석 연구팀이 최초로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켰는데, 나중에 황우석과 인연을 맺은 문신용 박사가 이 연구팀에 연구원으로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 뒤 1988년 홋카이도대 후쿠이와 오노 연구팀이 체내성숙난자가 아닌 미성숙난자를 체외에서 배양한 시험관 송아지를 탄생시키자, 황 박사도 체외 수정을 통한 시험관 송아지 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당시 후쿠이와 오노 연구팀과 공동 연구했던 권오경 박사가 서울대 수의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황 박사의 연구는 탄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체외수정은 단순한 생물기술의 발전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복제혁명의 토대를 놓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동안은 자연에서 성숙한 난자를 처리해서 한 마리당 고작 십여 개를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미성숙난자 이용한 체외수정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동물난자의 수를 무한대로 늘려줬습니다. 특히, 소의 경우 난자가 들어 있는 난포세포는 대부분 성숙된 난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사라지지만 적절한 조건에서 인위적으로 배양하면 수많은 성숙난자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소의 난자는 도축장에서 대량으로 구할 수 있어 실험에 쓰기에 매우 유리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난자 다루는 기술은 의학 분야가 수의학 분야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물을 다룰 수 있다는 장점(사실상 난자를 무한정 획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난자를 다루는 기술이 수의학 분야에서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체외수정 연구에서 가장 어려운 난점은 수정란이 8~16세포기에서 분열이 중단된다는 사실입니다. 미성숙난자를 배양, 수정해서 배반포기까지 키워야 수태율이 높아지기에 초기 배아의 성공적인 배양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이 문제를 실제 발육되는 난관의 상피세포를 채취해 수정란과 같이 배양시키는 방법을 써 해결했습니다. 즉, 체외수정으로 개체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수정란의 분할율을 크게 높이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1993년 드디어 황우석은 국내 처음으로 시험관 송아지를 생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연구팀은 미성숙난자 체외 배양으로 280개의 난자 얻어 그것을 배반포기로 키워 68개를 대리모에게 이식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태어난 송아지는 홀스타인 젖소 난자와 한우 정자를 사용해 온몸이 진한 밤색인 잡종 송아지였습니다. 이 시험관 송아지를 통해 ‘황우석’이라는 이름이 처음 언론에 등장하게 됐습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황우석은 그동안은 난자의 체외배양과 체외수정, 수정란 이식 등 시험관 송아지 생산 과정에 대한 연구가 부분적으로 이뤄졌지만 이번 연구는 전 과정을 접합시켜 순수한 시험관 송아지를 국내에서 최초로 생산했다고 밝혔습니다. 황우석은 시험관 송아지 생산에 성공한 뒤 바로 수정란 복제 연구에 뛰어들었습니다. 특히 이병천(현 서울대 수의대 교수)이 박사과정에 진학하면서 연구에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수정란 복제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발생 중인 수정란의 할구를 분할(수정란 분할)하거나 할구의 핵을 다른 난자에 이식(핵이식)해 복제 동물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수정란 복제는 성체가 아닌 배아의 핵이나 세포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체세포 복제와 다릅니다. 우수한 유전형질을 똑같이 지닌 동일 개체를 단기간에 여러 마리 생산이 가능한 기법입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생쥐를 이용해 수정란 핵이식 복제에 대한 연구 체계를 상당 부분 확립했습니다. 복제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핵이식과 세포융합, 복제 수정란 배양입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연구 초기에 사용하던 끝이 예리한 피펫 대신 끝이 둔한 피펫을 사용해 핵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세포질이 손상되는 걸 최소화했습니다. 세포 융합은 조작이 복잡하고 정확도가 떨어지는 센다이바이러스 대신 수치 조작으로 정확도를 조절할 수 있는 전기 자극법을 이용했습니다. 또, 융합된 세포 발육은 세포를 키우는 배지의 농도를 조절해 배양을 시도했습니다. 사실 이런 개별 복제기술은 주로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한 성과들이었습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이런 기술들 잘 응용해 실제 연구에 적용해 나갔습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소 복제에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소를 복제하는 건 쥐의 그것과 달리 축적된 연구데이터가 없어 성공하기 매우 힘들고 어려운 연구였습니다. 그러나 황우석 연구팀은 다른 연구팀들과 달리 체외 수정의 연구 경험이 풍부했고, 도축장에서 얻은 엄청난 양의 난자를 이용해 반복된 실험을 거쳐 시행착오를 고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1995년 연구팀은 마침내 소 수정란 핵이식 복제에도 성공했습니다. 홀스타인 젖소와 한우를 대상으로 핵이식을 통한 복제를 시도해 성공적인 수정란 복제가 이뤄졌습니다. 홀스타인 복제 젖소가 가장 먼저 탄생을 했는데, 이는 젖소가 한우보다 경제적인 가축이어서 젖소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해 왔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황우석은 핵이식 기법의 성공으로 혁명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황우석은 상대적으로 연구 시작은 다소 늦었지만 매우 짧은 시간에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팀으로 거듭났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우선 황 박사는 해외연수를 통해 세계적인 연구 흐름을 예리하게 파악했고, 이를 즉각 연구에 반영했습니다. 또, 동물의 난자는 손쉽게 대량으로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을 이용해, 성실하고 꾸준히 연구한 끝에 정상 수준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구팀은 인공수정, 수정란 이식, 체외수정, 수정란 복제를 순차적으로 성공해 나갔는데, 이 연구 하나하나는 그 다음 연구의 중요한 디딤돌이 돼 주었습니다. 이처럼 황우석 연구팀은 성실하고 꾸준한 연구로 정상 수준의 연구팀으로 거듭났습니다. (계속)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995991
복제 혁명의 물결 혁명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동안 영국 외딴 시골에서 생물학의 혁명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1996년 7월, 영국 월머트·캠벨 연구팀이 체세포를 이용한 양 복제에 성공했습니다. 연구팀은 가슴이 유달리 큰 미국 가수 돌리 파톤(Dolly Paton)의 이름 따 복제 양의 이름을 '돌리'라고 지었습니다.'돌리'의 탄생에 과학계는 경악했습니다. 돌리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체세포를 이용한 포유류 복제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정설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학설을 뒤집은 이 연구 성과는 왓슨과 크릭이 DNA 분자구조를 밝혀낸 업적에 버금가는 또 다른 생물학의 혁명으로 평가받았습니다.충격을 받은 건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적어도 돌리가 태어나지 전까지 사람들은 똑같은 생명을 복제한다는 것은 공상과학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돌리’는 이런 일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입니다.그럼 왜 돌리의 탄생이 생물학의 혁명으로 평가 받았을까요? 당시 과학자들은 세포의 분화 정도가 복제 가능 여부를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이라고 믿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수정란이나 초기 배아는 복제가 가능하지만 이미 분화가 시작됐거나 완료된 세포는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세포 분화가 완성된 ‘어른 세포’는 복제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월머트 연구팀은 다 큰 양의 체세포를 이용한 복제에 성공한 것입니다. 월머트 연구팀은 어떻게 성체세포를 이용한 복제에 성공했을까요? 여기에는 세포가 어떻게 분화되고, 분화 과정이 어떻게 조절되는지(이른바 '세포주기')에 대한 발상의 전환과 새로운 통찰력이 주요했습니다. 월머트 연구팀도 이 연구의 핵심이 세포주기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복제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이 세포주기를 조절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세포주기 연구를 담당했던 켐벨이 분화가 진행된 세포라도 세포주기를 G0나 G1에 맞추면 초기 상태로의 재프로그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켐벨은 혈청의 배양액 농도를 크게 줄여 공여핵을 세포 분할 전 단계인 G0로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포를 굶겨서 분화하기 이전 상태로 되돌린 것입니다. 월머트 연구팀의 유일한 독창적인 연구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발견이었습니다. 이는 세포주기를 적절히 맞추면 분화된 세포를 가지고 포유류의 복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획기적인 연구 성과였습니다. 이 연구로 성체세포는 분화 능력을 잃어버려 재프로그램 될 수 없다는 기존의 정설은 한 번에 무너졌습니다. 확률이 너무 낮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던 분화 세포의 복제를 실험이 가능한 수준으로까지 올려놓은 것입니다.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돌리'의 탄생에는 한국인 정희태 교수(강원대 수의학부)의 연구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정 교수는 강원대 축산학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3년 쓴 박사 논문에서 정 교수는 생쥐 수정란 복제를 위해선 세포주기를 G1 상태로 맞춰 재프로그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월머트 연구팀의 켐벨은 이 논문을 참고해 세포주기를 되돌리는 데 성공했고, 이 사실을 '돌리' 논문에서도 명백히 밝혔습니다.과학자들은 왜 동물을 복제하려고 애를 쓸까요? 동물 복제연구는 여러 면에서 많은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학문적으론 베일에 싸여 있는 발생의 신비를 밝히고, 세포가 작동하는 기전을 이해하고 유전자 조작의 세부 결과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산업적으로는 형질전환 동물 생산, 멸종 동물의 복제, 질병 모델 동물의 생산, 이종장기 개발 등에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물론 넘어야 할 산도 많습니다. 복제 동물의 높은 치사율, 선천적 기형, 빠른 노화 등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또, 이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유전자 조작된 복제인간이 태어날 수 있어 이를 둘러싼 사회적·윤리적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그런 점에서 '돌리'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습니다. 과학사를 다시 썼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다음 복제 대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이라는 우려가 같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제 연구에 대한 기대와 그것이 가지고 올 윤리적 논란도 같이 일어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언론을 통해 황우석 박사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복제 전문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황 박사는 국내에서 최초로 수정란 복제소를 탄생시킨 복제 연구의 선두주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당시 황우석과 월머트의 관심 주제는 달랐습니다. 월머트 연구팀이 알부민, 인슐린 같이 인간에게 유용한 희소물질에 관심이 많았다면, 황우석은 소, 돼지, 말 등 가축의 대량 증식과 개발에 연구 목표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영국 월머트 연구팀이 다시 형질전환 복제양인 '폴리'를 탄생시켰습니다. 형질전환과 체세포 복제기술이 사용하면서 면역거부 반응울 극복할 가능성 생긴 것입니다. 이때부터 황우석도 체세포 복제기술이 지닌 가능성에 눈을 떴고,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게 됐습니다.영롱하지 않은 영롱이(Young-Long) '돌리'가 태어난 지 1년이 넘도록 새로운 복제동물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태아세포를 이용한 복제 연구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성체세포를 이용한 복제 연구는 답보상태였습니다, 그러던 1998년 8월 모 언론에 우리나라에서 '돌리'처럼 체세포 복제기술을 이용한 송아지가 태어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황우석 연구팀이 복제소 임신에 성공했고, 연구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1999년 1월 복제소가 태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마침내 1999년 2월 12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나라 최초의 복제동물 '영롱이'가 태어났습니다. 언론은 포유류 복제에 성공한 황우석 연구팀을 칭송했고, 황 박사를 '대한민국 대표 과학자'라고 치켜세웠습니다. 외환위기로 시름에 잠겨있던 국민들도 큰 과학적 성과에 환호했습니다. 또 다른 신화가 입혀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그런데 생명과학계를 중심으로 '영롱이'의 탄생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1월에 태어난다고 한 영롱이가 2월에 태어난 점, 체세포를 제공한 어미 소가 도축되고 없다는 사실, '영롱이'에 대한 연구논문이 한 편도 없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영롱이'에 대한 논문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습니다.흔히들 저희 기자들은 '기사'로 말한다고 애기합니다. 마찬가지로 학자들은 연구 성과를 '논문'이라는 형태로 발표합니다. 물론 요즘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언론에 먼저 연구사실을 발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연구 논문이 없다는 건 과학자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그 점에 대해 황 박사는 2005년 'PD수첩'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시 이미 외국의 다른 연구실에서도 동물복제에 대한 성과가 나와 있어 영롱이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를 해도 과학 저널에 실리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빼어난 연구 업적을 황 박사 스스로 부정한 발언이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PD수첩 제작진은 영롱이가 복제소라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그럼, 진실은 무엇일까요? 딱 잘라 얘기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 황우석 연구팀에서 발표한 논문들을 보면 대략적인 정황을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영롱이가 태어난 1998년 황우석 연구팀에서 발표한 논문들 가운데는 성체세포 복제에 관한 논문은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성체세포 복제와는 거리가 있는 체외수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최초로 성체세포 복제에 관련된 논문이 나온 건 그로부터 2년 뒤인 2000년이었습니다.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이는 영롱이가 복제소가 아닌 체외수정으로 태어난 소일 수 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합니다. 일부에서는 당시 소의 유산을 일으키는 브루셀라병으로 진짜 복제소가 유산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어느 경우든 '가짜 복제소 논란'이 일어난 건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그러나 황우석 연구팀이 성체세포 복제기술을 특허 출원한 1999년 7월의 자료를 보면 이때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연구 자료를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부터는 성체세포에 관한 학위 논문이 계속 나왔습니다. 이런 결과로 미뤄 일부 학자들은 영롱이는 복제소가 아니고, 진짜 동물복제는 그 다음 해 쯤 성공했을 수 있다고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 최초의 복제동물과 그 연구자에 대해선 단정하기 힘들게 됐습니다. 어쩌면 '알 수 없다'고 과학사에 기록하는 게 가장 정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영롱이' 관련 얘기를 마치기 전에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우선, '영롱이'의 복제동물 진위를 떠나 황우석 연구팀은 정상급 수준의 동물복제 연구력을 갖췄다는 사실입니다. 복제 연구에는 핵 제거와 이식, 세포 융합, 배아 이식 등 다양한 과학기술이 필요한데, 황우석 연구팀이 등록한 특허를 보면 중요한 고비마다 독창적인 기술을 확보해 연구를 발전시켜온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핵을 안전하게 꺼내기 위해 고안된 이른바 '젓가락' 기술, 세포융합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최적의 전기자극의 횟수와 시간 등을 밝혀낸 것은 획기적이고 우수한 연구기술이었습니다. 그만큼 복제 연구에 관해서는 다른 연구팀들보다 앞서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두 번째로 '영롱이'의 탄생은 황 박사에게 엄청난 선물들을 안겨줬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황 박사는 가축 번식과 복제 분야에서 저명한 학자였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영롱이'의 탄생 덕분으로 한 번에 '스타 과학자'로 떠올랐습니다. 또, BK21사업, 농림부, 삼성 그룹 등 각계로부터 많은 연구비를 받아 연구를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습니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수의학은 물론 의학, 유전학, 축산학, 분자생물학, 간호학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우수한 인재들이 황우석 연구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들 인재들은 황우석 연구팀의 가장 중요한 인적자산이 됐습니다. 이처럼 황 박사는 '영롱이'의 탄생으로 다른 경쟁자들을 단번에 제치고, 본격적으로 연구 확장에 나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계속)
문어발식 경영의 시작그러나 이렇게 연구 범위를 확대하면서 비극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황우석 연구팀의 인력은 60여 명으로 세계 최대 규모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많은 연구를 추진하다보니 곳곳에서 부실한 점들이 드러났습니다. 줄기세포 배양실험을 간이 막사에서 하다가 세포가 곰팡이에 오염되기도 했고, 어린 복제돼지를 멀리 있는 양육시설로 옮기는 과정에서 돼지들이 폐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보통의 연구실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는 사고입니다. 이런 사고들이 연구에 막대한 지장을 끼쳤습니다.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연구는 매우 전문적이어서 모든 연구를 혼자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황 박사도 연구를 확장해 나가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과학자들과 공동연구를 추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황우석 연구팀은 연구 주도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황우석 연구팀이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줄기세포와 이종 장기 연구는 그동안 '의학' 분야에서 주도했던 연구과제였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황 박사는 학문적으로 '적자'가 아니었습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연구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은 그 분야에 노하우를 가진 연구자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얼마 전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황 박사는 미국 피츠버그대학 '섀튼' 교수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섀튼' 교수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지만, 넓은 범주에서 보면 위에서 언급한 얘기와 같은 맥락입니다. '공동 연구'라는 미명 아래 논문 게재 주선, 노벨상 추천 같은 부수적이고 이득은 있었을지 몰라도 실제 연구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황 박사는 국내에서는 최고 수준의 과학자였지만, 국제 과학계에선 아직 무명 인사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외국 과학자들과 동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 일정 부분 양보하고 포기해야 했습니다. 겉은 화려하고 멋있었지만, 기대만큼 내실을 채우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줄기세포, 그리고 논문조작 줄기세포에는 엄청난 놀라움과 신기함이 있습니다. 이 세포는 모든 장기와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습니다. 줄기세포 덕분에 도롱뇽의 꼬리는 잘려도 다시 생겨나고, 히드라는 몸의 20분의 1만 있어도 몸 전체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도 줄기세포를 확보한다면 다친 장기와 조직을 원상회복할 수 있습니다. 공상영화에나 나오는 꿈같은 얘기입니다.그러나 줄기세포를 확보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 줄기세포를 우리가 원하는 특정 세포로 분화시키는 건 더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줄기세포 연구는 수정란이나 복제배아를 이용할 경우 사회적·윤리적으로 큰 논란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건 우선 생명의 시작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배아'가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또, 복제배아를 다루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복제가 이뤄질 우려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으로도 신의 영역으로 여겨온 인간생명을 인간이 조작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황 박사가 인간 줄기세포 연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1999년부터였습니다. 이 무렵 황 박사는 동물의 난자를 이용한 복제기술을 통해 불치병 치료기술을 개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동물의 난자는 우선 구하기 쉽고, 황우석 연구팀이 오랫동안 다뤄온 분야이어서 현실적으로 연구가 수월했습니다.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연구팀은 36세 남성의 체세포를 복제해 세계 최초로 배반포 단계까지 배양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문제는 성공률이었습니다. 1,742개의 난자를 이용했지만 고작 11개의 배반포를 만들어 내는 데 그쳤습니다. 배반포 형성률은 고작 0.6%. 엄청나게 많은 난자를 실험에 이용했지만 줄기세포는커녕 배반포도 만들기 어려웠습니다.동물의 난자로는 실험에 한계가 있다 판단한 황우석 연구팀은 핵이식용 난자를 동물에서 인간으로 바꾸었습니다. 인간의 난자는 수의학 연구 분야에서 다루지 않아 황우석 연구팀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성근, 류영준 두 박사가 연구팀에 합류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강성근은 난자가 들어 있는 난소를 오랫동안 다뤄왔고, 류영준은 의과대학 출신이었습니다. 서울대 의대 문신용 연구팀의 지원도 큰 힘이 됐습니다.실험에 사용할 여성의 난소는 한양대병원에서 얻었습니다. 30명의 여성 난소에서 추출한 166개의 난자를 복제배아 줄기세포에, 나머지 84명의 여성 난소에서 얻은 371개의 난자는 수정란 줄기세포 연구에 사용됐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좋지 않았습니다. 배반포 형성률이 1%를 넘지 못했습니다.연구가 벽에 부딪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소의 난자는 쉽게 얻을 수 있고 양도 많았지만 서로 다른 종이라는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인간난자는 대상자의 나이가 많고 미성숙난자였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난자였는데, 인간의 싱싱한 난자를 어떻게 대량으로 확보할 것인가가 관건이었습니다.황 박사는 다른 연구팀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서울대 의대 문신용, 미즈메디병원 노성일이 황우석 연구팀과 공동연구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복제배아의 생산을 맡되 인간난자를 다뤄본 경험이 적었으므로 의대 문신용 연구팀의 자문을 받기로 했습니다. 줄기세포 추출과 배양은 냉동배아 줄기세포를 연구해온 노성일 연구팀이 맡기로 역할을 나눴습니다.노성일이 운영하는 미즈메디 병원은 불임치료 전문기관으로 다량의 난자를 비교적 쉽게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2002년 11월부터 2003년 3월까지 21명의 여성에게서 423개의 난자를 채취해 황우석 연구팀에게 제공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난자가 줄기세포 연구에 한꺼번에 대량으로 사용되는 건 다른 나라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난자를 이용했지만 연구 성과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습니다. 복제배아를 배양해 30개의 배반포를 얻었지만, 최종 결과물인 줄기세포는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드디어 황우석 연구팀은 2004년 '사이언스'를 통해 인간복제배아 줄기세포 1개(SCNT-hes-1)를 확립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연구가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이 논문으로 황 박사는 한 순간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이때부터 언론은 황 박사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예상하기 시작했습니다.그 연장선상에서 2005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수퍼급 논문'이 '사이언스'에 또 실렸습니다. 11명의 환자 체세포를 가지고 복제배아 줄기세포를 모두 확립해 매우 높은 효율로 환자맞춤형 줄기세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줄기세포 배양에 동물 세포가 아닌 인간 세포를 이용해 실제 치료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줄인 점도 큰 연구 성과라고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은 영광스럽게 사이언스의 ‘표지 논문’으로 실렸습니다. 언론은 황우석 박사를 세계 최고의 과학자라고 추켜세웠습니다. 국민들은 환호했고, 세계적인 과학성과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게 됐습니다.이때부터 황우석 연구팀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세계줄기세포허브 건립을 추진했습니다. 황 박사는 이 프로젝트에 세계적인 줄기세포 연구자들을 참여시켜 줄기세포 후속 연구와 연구 주도권을 한꺼번에 잡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습니다. 돌리를 탄생시킨 월머트와 원숭이 복제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고 있었던 섀튼 같은 연구자들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황우석은 노벨상에 한 걸음 다가선 것으로 보였습니다.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받아온 연구비도 대폭 올라갔습니다.그러나 2006년 1월, 서울대 조사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이 연구논문은 거짓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확립된 복제배아 줄기세포가 하나도 없다고 판정 내렸습니다. 조사 결과, 논문에 사용된 줄기세포 염색사진, DNA 지문분석, 테라토마 사진, 영양세포, 난자 개수 등 논문 대부분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논문 제출 시점까지 확립했다고 알려진 2, 3번 줄기세포도 미즈메디병원의 4번 8번 수정란 줄기세포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그나마 확보했다던 1번 줄기세포도 탈핵이 되지 않는 난자의 자체 처녀생식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습니다. 줄기세포의 DNA 지문이 체세포 공여자의 DNA 지문과 다르고, 그 불일치 부분은 체세포와 달리 동형접합을 모두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한마디로 자체 돌연변이로 줄기세포가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1번 줄기세포의 각인 유전자를 자체적으로 검사한 결과, 모계 유전자와 부계 유전자가 모두 나왔으므로 처녀생식이 아닌 핵이식에 의한 줄기세포라고 서울대 조사 결과를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습니다.이에 서울대는 보충자료를 통해 1번 줄기세포의 각인 유전자가 모계 각인을 확연하게 드러냈고, 추가로 실시한 DNA 지문분석으로 더 많은 동형접합이 확인돼 처녀생식의 산물임이 확실하다고 발표했습니다.검찰도 서울대와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줄기세포가 바뀐 데에는 줄기세포 배양의 책임을 맡은 미즈메디병원 소속 김선종 연구원이 수정란 줄기세포를 남모르게 ‘섞어 심기’했기 때문이란 점도 분명히 밝혔습니다.사실, 황우석 연구팀이 만들었다고 밝혔던 1번 줄기세포도 정식 실험 프로토콜을 통해 형성된 건 아니었습니다. 황우석 연구팀이 1번 줄기세포를 처음 확립한 것은 2003년 2월이었습니다. 연구팀은 그 뒤 제2, 제3의 줄기세포를 확실하게 확립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습니다. 1번 줄기세포 확립 이후 체세포 핵이식 연구를 위해 제공된 난자는 600여 개로 이전에 제공된 약 400개에 비해서도 훨씬 많았습니다. 그렇게 노력을 열심히 했지만 ‘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한 2004년 2월까지 줄기세포를 얻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1번 줄기세포는 확실한 연구 노하우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연하게 예외적으로 얻는 부산물이었다는 얘기입니다.'사이언스' 논문에서 황우석 연구팀은 몇 가지 증거를 들어 1번 중 줄기세포가 핵이식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논문에서 DNA 지문분석이 동형접합이 아니라 이형접합을 보였으며 각인 유전자가 양 부모의 유전자를 모두 발현했다는 점을 핵이식 줄기세포의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지문분석의 일부가 일반적인 체세포 핵이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동형접합을 보인 것입니다. 또, 체세포 제공자, DNA 지문분석, 줄기세포 염색 사진, 테라토마 사진 등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연구팀은 자체적으로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요? 논문을 투고하기 전에 검증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와 관련해 이상한 점은 줄기세포주가 확립된 이후 DNA 지문분석 실험을 여러 차례 실시했는데도 정확한 데이터를 전혀 얻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2003년 5월 10월에 실시한 두 번의 실험에선 데이터가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2004년 2월과 9월에 실시한 3차, 4차의 실험에서는 줄기세포가 아닌 체세포의 DNA를 의뢰해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검증 실험 뒤에는 박종혁과 김선종 두 사람이었습니다.1차 실험 때 박종혁이 줄기세포를 김선종에게 넘겨주며 DNA를 추출하라고 했는데, DNA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2차에서는 박종혁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지인에게 줄기세포 DNA를 의뢰해 재검까지 했는데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3, 4차에서는 김선종이 수정란 줄기세포로 섞어 심은 사실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줄기세포가 아닌 체세포의 DNA를 분석 의뢰했습니다. 실제로 2005년 PD수첩이 김선종에게 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취재를 하고 있을 때 박종혁은 난데없이 첫 번째 2004년 1번 줄기세포도 확인했느냐고 묻는 ‘과민반응’을 보였습니다. 박종혁은 이미 벌써 1번 줄기세포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황 박사 지지자들은 황 박사가 사기를 당했고 연구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럼, 황우석 연구팀의 연구력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요? 동물복제와 인간배아복제연구에 있어서 황우석 연구팀의 연구력은 세계 최고 수준인 것으로 보입니다. 오랜 시간 소와 돼지를 이용해 연구복제 연구를 꾸준해 해 왔고, 가장 복제하기 힘들다는 개(스너피)까지 복제해 냈습니다. 인간배아복제에서도 다른 연구자들이 넘지 못했던 체세포 복제배아의 배반포 형성을 유일하게 성공시켰고, 줄기세포의 초기 형태인 콜로니도 만들었습니다.일부에서는 성공 요인을 순전히 인간난자를 대량으로 확보했기 때문이라고도 비판하는데, 이는 다소 일면적인 판단입니다. 동물복제와 인간배아복제는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고, 황우석 연구팀은 그동안 동물복제를 통해 축적해놓은 수준 높은 핵이식 기술과 복제배아 배양기술이 인간배아복제에도 도움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이런 점을 감안해서인지 서울대 조사위원회도 황우석 연구팀에 대해 동물복제는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인간배아 연구 능력은 독보적이지 않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근거로 정명희 서울대 조사위원장은 영국 뉴캐슬대학 연구팀이 복제배아를 배반포까지 성공시킨 연구 성과를 들었습니다.인간배아 연구 능력은 과소평가된 듯 그러나 이것 또한 연구팀이 가진 기술력을 다소 낮춰 평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 위원장이 언급한 뉴캐슬대학의 스토이코비치 연구팀은 황우석 연구팀보다 늦게 연구결과를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성체세포가 아닌, 연구하기가 훨씬 수월한 수정란 줄기세포의 핵을 연구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연구과정에서도 황우석 연구팀의 자문을 받았습니다.뉴캐슬대학은 복제배아 가운데 1개만 배반포로 키울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줄기세포 추출 연구는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또, 스토이코비치는 인간 배아복제 연구의 독창성과 우선권에 대한 완전한 명예(full credit)를 황우석 연구팀에게 주기 위해 논문의 출간을 늦춰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황우석 연구팀의 배아복제 관련 연구력도 세계최고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우석 연구팀의 이런 뛰어난 연구능력은 2004년과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이 모두 취소되면서 과학적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연구 책임자였던 황우석은 논문 조작사건을 일으킨 학문 범죄자란 불명예를 안게 됐습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줄기세포는 물론이고 복제배아, 배반포, 콜로니 등 연구 성과에 대해서도 우선권을 전혀 주장할 수 없게 됐습니다.검찰 조사에 따르면 줄기세포 조작은 김선종이 연구의 중압감과 학문적 욕심으로 독자적으로 벌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는 줄기세포 확립이 필요할 때마다 자기가 속한 미즈메디병원에 있는 수정란 줄기세포를 가져다가 배양 중인 복제배아의 배반포 내부 세포덩어리에 섞어 심어 가짜 줄기세포를 만들었습니다. 조명이 밝으면 세포에 좋지 않다며 작업대를 제외한 모든 조명을 끄게 한 후 작업을 벌이는 치밀함도 보였습니다. 또, 섞어 심은 일이 들통날까봐 체세포를 둘로 나눠 DNA 지문분석을 맡겼습니다. 김선종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해 제1저자로 발표한 논문은 물론이고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논문의 대다수도 사진을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박종혁도 김선종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2007년 1월엔 피츠버그대학에서 원숭이 줄기세포의 사진을 조작한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미즈메디병원 연구자들이 줄기세포 사진 조작을 워낙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벌인 까닭에 일부 연구자들은 미즈메디병원에 '포토샵 학원'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붙이기도 했습니다.황 박사를 비롯한 다른 연구원들은 확립된 줄기세포가 가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2번 줄기세포 연구가 2004년 9월에 비교적 손쉽게 성과를 거두자 연구팀은 말 그대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뒤이어 11월에 1개, 12월에 무려 4개의 줄기세포가 한꺼번에 만들어져 향후 얼마나 많은 줄기세포를 확립할 것인가는 시간문제로 여겨졌습니다.김선종은 황 박사가 DNA 검사 결과를 요구하자 DNA가 검출되지 않게 파라포름알데하이드에 30분 동안 담가뒀다가 넘겼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황 박사는 미국, 영국과 국내 유수 대학 연구소에 줄기세포를 분양해 공동 연구를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황 박사는 줄기세포의 상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김선종의 의견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다가 논문을 완전히 조작하는 상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한마디로 황 박사 자신이 연구과정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황 박사는 논문이 조작된 사실을 PD수첩이 취재를 벌이던 2005년 10월 이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황 박사가 줄기세포 연구에서 줄기세포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식하지 못한 책임은 매우 무겁습니다. 조작된 두 편의 '사이언스' 논문 교신저자이자 제1저자로서 논문 조작에 대한 그의 책임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실제로 논문 조작 사건 후 황우석 연구팀이 논문을 발표하면 과학계는 매우 엄격하고 날카로운 잣대로 연구논문을 검증하고 또 검증합니다. 논문을 조작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그의 재기를 회의적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기기도 합니다.하지만 연구팀에게 더 치명적인 문제는 김선종이 섞어 심기를 하면서 배반포에서 추출한 내부 세포 덩어리가 제대로 실험을 못한 채 버려졌다는 점입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약 70여 개의 배반포를 만들었는데 김선종이 수정란 줄기세포를 섞어 심음으로써 적절한 실험 결과가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실험조작 없었다면 줄기세포 확립 성공했을까?그럼, 만약에 김선종이 실험을 조작하지 않았다면 황우석 연구팀은 복제배아 줄기세포를 확립할 수 있었을까요? 황 박사의 지지자였던 박기영 전 청와대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은 그렇다고 주장했습니다. 황우석 열성 지지들도 마찬가지 입장을 보였습니다.실제 결과를 예상하긴 어렵지만 다수의 연구자들은 회의적인 입장을 보입니다. 연구팀은 이전의 핵심 인력이 빠져나가 경험이 적은 사람들로 새로 꾸려졌고, 연구 중단을 선언했다가 다시 재개한 까닭에 연구 기간은 최대로 잡아도 10개월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줄기세포 연구는 외부의 여러 연구자들과 공동 연구를 해야 하는 일이기에 어떤 면에서는 황우석 연구팀 내부의 능력을 떠난 문제였습니다. 다만, 김선종의 가짜 만들기가 없었다면 황우석 연구팀의 논문 조작 사건이 이렇게까지 크게 벌어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아울러 황우석 연구팀 자체의 문제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논문에 대한 검증 작업이 진행되면서 많은 연구자들이 연구팀의 허술한 실험 기록과 데이터 관리에 크게 놀랐습니다.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실험날짜, 연구 진행 상황, 최종 결과까지 너무 부실했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고의 연구능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던 연구팀이 왜 이렇게 허술했을까요? 이건 시행착오의 연속이라는 복제 연구의 특성과 어느 정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루에 1000개 이상의 동물 난자를 실험했던 연구팀은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는 실험 데이터를 굳이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거기다 복제 연구는 최종 성과를 먼저 내면 승리하는 특성상 결과를 중시하는 태도가 이런 문제를 더욱 부채질했을 것입니다.어쩌면 황우석 연구팀의 이런 부실한 연구 관리와 급한 연구 욕심이 김선종의 섞어 심기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황 박사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됐습니다. 이로 인해 21세기 바이오 코리아를 외치던 황우석의 웅대한 꿈은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갔고, 그의 대규모 연구팀도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계속)
얼마 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황우석 박사는 섀튼에 대한 섭섭함을 표했습니다. 왜 황우석 박사는 섀튼을 원망했을까요? 섀튼은 황우석 연구팀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논문조작에도 관여했을까요?앞서 얘기했지만 조작된 논문의 제1저자로서, 교신저자로서 황 박사의 책임은 매우 무겁습니다.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논문조작의 최종적인 책임은 결국 연구책임자였던 황 박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황우석 연구팀과 공동연구를 했던 피츠버그대 섀튼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과학과 정치의 미묘한 관계가 숨겨져 있습니다. 과학이 정치를 만났을 때의 생길 수 있는 어떤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지를 자세히 보여주었습니다."섀튼은 누구인가?" 새튼은 오랫동안 평범한 과학자였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동물학을 전공했고, 1975년 동물난자의 분자구조와 기능에 대한 연구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주로 바다성게에 대해 연구하던 섀튼은 1990년 위스콘신대학으로 옮겨 생쥐, 소, 돼지 등을 대상으로 연구를 해왔습니다. 이때까지도 섀튼 유명 과학 잡지에 논문을 실지 못하는 평범한 연구자였습니다. 1997년 복제양 돌리의 탄생이 전해지자, 섀튼은 오리건의 국립영장류연구센터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원래 섀튼은 인간을 대상으로 복제 연구를 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대신 인간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를 대상으로 복제연구를 시작했습니다.그렇지만 원숭이 복제는 쉽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성공할 기미가 안 보이자, 섀튼은 연구방향을 조금 바꿨습니다. 어려운 성체세포를 이용한 복제가 아닌 쉬운 배아분할로 복제 원숭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배아분할은 오래전에 개발돼 하등동물과 가축 복제 등에 사용된 구식 기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섀튼이 배아분할에 의해 최초로 탄생시킨 복제 원숭이 '테트라(Tetra)' 관한 연구 논문은 당당히 '사이언스'에 실렸습니다.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평가는 냉혹했습니다. 새로운 복제기술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쌍둥이처럼 닮은 두 마리가 태어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지금은 체세포를 이용한 핵이식만 복제 연구 범위에 포함시키고 있을 만큼 배아분할 연구는 오래된 방식이었습니다.그럼, 왜 '사이언스'는 평범한 논문을 왜 채택한 것일까요? 이는 과학도 대중적 지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과학연구는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주제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세계 최고의 과학 잡지라고 평가받는 '사이언스와 '네이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원숭이 복제는 과학 기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대중들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주제였습니다.언론도 재빨리 이 연구 성과를 보도했습니다. 대중들은 이제 복제인간의 출현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점을 노렸는지 섀튼은 논문에서 영장류 “복제(CLONE)”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섀튼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주제로 연구 방향을 바꾸면서 그가 그렇게 바라던 '스타 과학자' 반열에 오르게 됐습니다.'네이처', '사이언스', '셀' 같은 세계적 과학 잡지에 논문이 실리면 학문적 명성은 물론 연구비, 연구인력 등이 함께 따라옵니다. 야심이 컸던 섀튼은 영장류 연구센터 팀장 자리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리건을 사랑하지만 과학을 더 중요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피츠버그대 발생연구센터로 자리를 옮겼습니다.이곳에서 섀튼은 본격적으로 체세포를 이용한 원숭이 복제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섀튼 연구팀은 핵이식된 원숭이 복제배아는 세포가 분열할 때 염색체를 이동시키는 방추제(Spindle)가 단백질 결함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밝혔습니다. 한마디로 체세포를 이용한 영장류 연구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이 연구 결과도 2003년 사이언스에 실렸습니다. 이는 결국 영장류는 물론 인간을 대상으로 한 복제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연결됐고, 섀튼은 다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섀튼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간을 복제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물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섀튼은 '영장류는 복제가 안 된다'는 논문만을 발표했을 뿐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이 논문으로 세계 최고의 복제 전문가로 거듭났습니다.황우석과 섀튼의 만남…사이언스 논문 게재를 돕다 황 박사가 섀튼과 만나게 된 계기도 이 논문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줄기세포를 성공적으로 확립해가던 황 박사는 섀튼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설명했습니다. 마침 황우석 연구팀이 '네이처'에 투고한 논문이 거절당하자, 황 박사는 네이처에 재도전하는 대신 '사이언스'에 투고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때부터 섀튼의 도움이 시작됐습니다. 섀튼은 '사이언스' 편집인들에게 로비를 펼치면서 황우석 연구팀의 논문을 수정·보완해줬습니다. 결국 이 연구논문은 2004년 '사이언스'에 표지 논문으로 실렸습니다. 그 뒤로 섀튼은 황우석 연구팀의 복제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더 깊이 개입했습니다. '논문 조작'이라는 비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섀튼은 실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서둘러 논문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황우석 연구팀은 그의 급박한 요청에 맞춰 다양한 실험 결과를 보냈습니다. 섀튼은 연구논문을 빨리 발표하려고 했고, 황 박사는 거기에 맞춰 따라가기 급급했습니다.그 과정에서 줄기세포가 곰팡이에 오염되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논문 작성은 계속됐습니다. 섀튼은 줄기세포 오염 사고를 보고받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논문 투고를 서둘렀습니다. 이렇게 급박하게 논문을 준비한 끝에 2005년 5월 19일 새로운 연구 성과가 '사이언스'에 실렸습니다. 이 논문으로 황 박사도 세계 과학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됐습니다.이렇게 황 박사와 섀튼이 잘 지낼 수 있었던 건 둘 사이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황 박사는 국제 과학계에 자신을 알려줄 힘 있는(?) 과학자와의 인맥이 필요했고, 섀튼은 자신이 풀지 못한 복제 연구에 돌파구를 제시할 실력 있는 과학자가 필요했습니다. 2003년 11월 말 섀튼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두 사람은 공동연구를 추진하기로 했고, 다음해 1월 말엔 황 박사가 피츠버그를 방문해 공식적인 합의를 맺었습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거의 매달 만났고, 수시로 이메일이나 전화를 주고받으며 친구처럼 지냈습니다.이를 계기로 황우석 연구팀의 연구자들이 섀튼의 연구센터로 파견가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 9월 복제 전문가 현상환 박사가 제일 먼저 박사 후 과정 연구원으로 건너갔고, 최고의 핵이식 기술을 가진 박을순도 옮겨갔습니다. 그 뒤 미즈메디병원의 박종혁과 김선종 박사도 섀튼 연구센터로 건너갔습니다.그 뒤 섀튼 연구팀은 그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원숭이 복제배아를 배반포까지 배양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불과 1년여 전 자신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내용을 뒤집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현상환, 박을순 같은 황우석 연구팀 연구자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그러나 섀튼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황우석 연구팀과의 협력 관계를 맺는 동안 황우석 연구팀의 핵심적인 핵이식 기술과 줄기세포 배양기술을 확보하려고 애섰습니다. 이 기술을 이용한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볼 때 새튼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 기술들을 습득한 것으로 보입니다.섀튼은 황우석 연구팀의 논문을 기반으로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1천 6백만 달러의 연구비를 얻었습니다. 사이언스에 논문을 게재하도록 도와주었다는 명목으로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 특허의 지분을 요구했습니다. 장차 세워질 세계줄기세포허브의 재단 이사장 자리를 노리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섀튼은 자신의 연구팀이 주도한 논문에는 처음을 제외하곤 황우석의 이름을 넣지 않았습니다.섀튼, 황우석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다 2005년 11월 12일, 황우석을 형제라고 부르던 섀튼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황우석 연구팀과의 결별을 선언합니다. 사전에 황 박사와 상의하거나 언질도 없이 급작스럽게 이뤄진 조치였습니다. 당시는 'PD수첩'을 통해 난자 관련 문제가 언론에 보도됐을 때고, 줄기세포 조작에 대한 취재도 상당부분 진행이 된 상태였습니다. 이미 핵이식과 줄기세포 배양 기술을 일정 부분 확보한 섀튼은 서둘러 결별을 선언한 것입니다. 결별 이유로 난자 문제만을 들었지만, 정황상 줄기세포의 진위 문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황우석 연구팀의 논문 조작 의혹이 불거지자 피츠버그대학은 섀튼에 대한 조사를 벌였습니다. 조사위원회는 조작된 '사이언스' 논문과 관련해 연구성과 감독 부실 등에서 부적절한 처신(research misbehavior)이 있었지만, 좁은 의미에서 과학연구의 부정행위(research misconduct)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습니다.이렇게 새튼이 관대한 처분을 받은 데는 황 박사와의 재빠른 결별이 주요했습니다. 섀튼은 황우석 연구팀과 빨리 결별을 하되 그 사유를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난자 문제만을 거론해 피그버그대학을 보호했습니다. 피츠버그대학도 야심차게 준비한 연구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섀튼에게 면죄부를 줬습니다.이처럼 새튼은 황우석보다 한 수 높은 정치적 기술(?)을 발휘했습니다. 협력을 통해 자신의 이익은 최대로 챙기면서 빠른 결별을 통해 자칫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자신도 구한 것입니다. 황 박사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섀튼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토로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마지막으로 다음에는 '과학과 정치'에 대해 쓰고 황우석 글 마치겠습니다. 트위터페이스북미투데이요즘ⓒ로그인쇄하기크게보기작게보기
황우석의 재기, 그리고 과학과 정치 황우석 박사가 돌아왔습니다. 희망의 '복제 코요테'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멸종위기에 처한 코요테의 피부 체세포를, 종이 다른 개의 난자에 넣어 복제에 성공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복제기술을 이용해 매머드도 복제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도 함께 언급했습니다.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역시 황우석이다'라는 긍정적인 반응과 '또 언론플레이를 한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 황 박사를 용서하고 우수한 기술을 살자는 의견과 논문을 조작한 과학자에게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는 반론까지 팽팽히 맞섰습니다.제가 눈여겨봤던 부분은 황 박사가 연구 성과를 논문이 아닌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는 점입니다. 대게 과학자들은 학술지를 통해 연구 성과를 발표합니다. 언론에 먼저 발표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닙니다. 그러나 황 박사는 학술지 게재라는 정공법 대신 '언론 발표'라는 우회로를 선택했습니다. 절치부심 준비한 복귀 무대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방식입니다.이에 대해 황 박사는 논문 엠바고 등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해명했습니다. 표면적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구 내용을 언론에 다 공개한 상황에서 논문 엠바고는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언론 발표는 황 박사가 아직 제도권 과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황 박사에겐 과학자로서는 치명적인 '논문 조작'이란 주홍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때문에 황 박사가 논문을 투고 하면 과학계는 매우 엄격하고 잣대로 검증하고 또 검증합니다. 일종의 '황우석 디스카운트'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황 박사는 까다로운 검증을 통과해야 하는 학술지 게재 대신 상대적으로 검증이 느슨하고, 홍보 효과도 좋은 언론을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이제 황우석 박사의 재기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주대 줄기세포연구센터 박세필 교수도 얘기했다시피 이번 코요테 복제는 국내 복제기술 수준을 보여준 매우 의미 있는 연구 성과입니다. 그만큼 아직 황우석 박사의 연구력이 상당한 수준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은 사실은 황 박사의 재기 여부는 이미 황 박사 자신의 손을 떠난 문제라는 점입니다. 황 박사의 재기 여부는 가깝게는 정치인, 궁극적으로는 우리 국민에게 달려 있습니다.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과학과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과학과 정치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지저분하고, 진실이 없는 문제투성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과학은 그와 정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늘 깨끗하고 고귀하며 오직 진실만을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학은 지저분한 정치와는 분리돼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과 정치는 매우 가까운 '공생관계'라고 보는 게 더 적합할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연구 업적을 내기 위해선 연구비가 필요하고, 그 연구비는 결국 정치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입니다.물론, 정치인들이 아무 과학에나 관심을 갖는 게 아닙니다. 정치인들도 자신의 지위나 인기를 높이고, 선거 등에 도움이 되는 과학에 '정치적'이고 '계산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그 '정치적'이고 '계산적'인 접근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국민입니다. 왜냐하면 정치 권력은 바로 국민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힘 있는 정치권력의 지원을 받으려면 과학은 우수하고 사람들의 눈길을 한 번에 사로잡을 대중적 호소력 있는 성과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그런 점에서 황 박사도 재기를 하기 위해선 아직 자신이 건재하다는 걸 정치권과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구 성과를 내야 했고, 또 그것을 멋지고 그럴듯하게 포장해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철저한 검증을 통과해야 하는 논문발표보다는 대중과 직접 소통하고 폭발력이 큰 언론 발표가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물을 포장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됐던 '최초의 이종교배', '멸종위기 동물인 코요테', '매머드의 복제' 같은 수사적 표현들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결국, 황 박사의 재기 여부는 황 박사 자신이 아닌 우리 국민들이 쥐고 있는 셈입니다. '황우석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것 '황우석 사태'는 우리 사회에게 많은 숙제를 남겼습니다.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던 일그러진 경쟁 욕구, 무조건 성과만 내면 된다는 결과 만능주의 그리고 희박한 윤리 의식….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황우석 사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이를 두고 "황우석은 우리의 얼굴이다"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황우석 사태는 오랜 기간 동안 형성되어온 우리의 부끄러운 내면의 실상을 보여주며, 반성하고 성찰하라고 재촉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이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더 큰 문제는 '황우석 사태'를 잉태한 씨앗이 아직 우리 사회 도처에널려 있다는 점입니다. '제2의 황우석 사태'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과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줄기세포사업을 포함한 대형 과학기술사업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사업을 이끌어갈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또 언론은 이를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황우석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입니다.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한세현기자....
질문자 인사
답변 덕분에 많이 알아갑니다.
ghdx****2017.08.08. 15:03:00
글 초반에 "물론 노벨상급의 훌륭한 연구결과를 내는데에는 실패했지만요."라고 써있는데 황우석박사님 노벨상 선정되셧다가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측한테 구라쟁이라고 이사람한테 주지 말라고 해서 취소된걸로 아는데요..? 저희 생물 쌤도 그렇게 말씀해셧구요
rise****2017.08.08. 14:53:43
안타갑게 생각합니다
다시 연구를 하셔서 대한민국을 빚내주시기를 소원합니다cars****2017.08.08. 10:10:10
미국 호주 캐나다 황우석 nt-1 세계최초 체세포복제 줄기세포 인정 특허 출원.
우리나라만 처녀생식이라고 우기면서 생매장, 유튜브 황우석 특허 검색해보세요.
천한? 수의사가 nt-1의 특허권을 개인이 아닌 국가에 바치려고 하자
우리나라 최고 기득권 가르텔 집단 괴수 서울대 의대 문*용 교수를 제치고 세계최고의 과학자가 될려고 하니 한국의 모든 매국 기득권들이 하이에나 처럼 달려들어 황우석 박사 생매장 시킴. 유튜브 황우석특허 검색해보세요.real****2017.08.08. 10:03:45
저는 황우석박사가 마녀사냥당한걸로 보이는데....수의학과출신이라는 점에서 무시당하고 핍박당한것도 추측할수있고 애초에 줄기세포가 구라라면 새튼이 기술을 뺏어서 급하게 특허시킬려고했던것도 있고 이상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음...
jsm1****2017.08.08. 08:48:23
대한민국 사람들은 결과를 내놓지않으면 인정하지않고, 1등이아니면 기억하지않는데 cona 님같은 사람들이 꼭 이중잣대를 들이밀며 욕을하지요.. 황우석박사를 옹호하는입장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을것같네요 ^^ 아니면 글을 이해를 못하신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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