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내 산천을 붉게 물들이던 배롱나무나 무궁화의 꽃이 시들어 떨어졌다. 이제 대개의 식물들이 열매 맺을 채비로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이때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이 있다. ‘꽃무릇’이라고도 부르는 ‘석산’이다. 큼지막한 꽃송이와 꽃송이 바깥으로 삐죽이 뻗어 나오는 꽃술이 독특한 분위기를 이루는 꽃이다.
땅 속에 몸을 숨겼다가 가을에 화들짝 꽃대를 솟구쳐 올리며 꽃을 피우는 석산은 여간 신비로운 식물이 아니다. 꽃무릇이라는 예쁜 이름은 나무 아래에서 무리를 지어 핀다 하여 얻었다. 석산(石蒜)이라고도 불리는 데, 이는 ‘돌 틈에서 나오는 마늘모양의 뿌리’라는 뜻이라 한다.
꽃무릇은 유독 절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쓰임새가 요긴하기 때문이다.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함유돼 있어서 탱화를 그릴 때나 단청을 할 때 찧어서 바르면 좀처럼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비늘줄기에 품은 유독물질을 제거한 다음 얻은 녹말로 한지를 붙이면, 강력한 살균력 때문에 역시 좀이 스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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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사화 . |
‘내가/ 마음을 비워/ 네게로 가듯/ 너도/ 몸 버리고/ 마음만으로/ 내게로 오라/ 너는/ 내 자리를 비우고/ 나는/ 네 자리를 채우자/ 오명가명/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이기 때문/ 마음의 끝이 지고/ 산그늘 강물에 잠기우듯/ 그리움은/ 넘쳐넘쳐 길을 끊나니/ 저문저문 저무는 강가에서/ 보라/ 저 물이 울며 가는 곳/ 멀고 먼 지름길 따라/ 곤비한 영혼 하나/ 낯설게 떠도는 것을.’
한국 시단의 중진으로 洪海里의 시 ‘상사화(相思花)’ 전문이다. 석산과 헷갈리기 쉬운 식물이 상사화(相思花)다.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달려 있을 때는 꽃이 없어 서로 만나지 못하면서 간절하게 그리워한다고 해서 그 이름으로 불린다는 상사화를 소재로 삼은 대표적인 시 중의 하나다.
둘 다 잎 없는 채로 50㎝까지 솟아오르는 꽃대 위에 꽃을 피우는 모습이 서로 닮았다. 석산을 상사화라 부르기도 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잎이 완전히 진 뒤에 꽃이 피는 상사화는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의 생태와 애틋한 사연의 전설을 지녔을 뿐 아니라 자태가 매혹적이기 때문에 완상(玩賞)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 많다.
둘 다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란 공통점이 있으나 상사화는 백양꽃·위도상사화·붉은상사화·붉노랑상사화·노랑상사화 등 여러 종류가 있고, 꽃무릇은 한가지뿐이다.
개화시기를 보면 상사화는 여름 칠월칠석을 전후해 피지만, 꽃무릇은 초가을인 백로와 추분 사이에 꽃을 피워낸다. 또 상사화의 꽃 색깔은 주로 연분홍이나 노랑이고, 꽃무릇은 아주 붉은 진홍색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결정적인 차이는 잎이 먼저 나느냐, 꽃이 먼저 피느냐에 있다. 상사화는 봄에 잎이 돋아나고 여름에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운다. 반대로 석산은 꽃이 잎보다 먼저 피어난다. 석산은 꽃이 지고 나서야 잎이 돋아 그 상태로 눈 속에서 겨울을 난다.
듣고 보면 분명한 차이를 알 수 있지만, 꽃만으로는 여전히 헷갈릴 수 있다. 그래서 눈에 담아두었던 식물을 다시 찾아보는 일만큼 좋은 일은 없다. 꽃이 시들어 떨어진 자리에 잎이 새로 나는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한 번 더 찾아오기를 바라는 식물의 구애(求愛) 전략인지도 모르겠다.
식물은 결코 서두르는 사람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여유를 갖고 오래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가을에는 꽃 지고 돌아보는 이 없어 쓸쓸해질 석산, 한번쯤 더 찾아보아야겠다.
김양근 <전남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장 /나무병원 杏林/ 숲해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