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

동백아가씨

U블럭 2013. 9. 18. 16:26

내 18번이다.

술 한잔 하고 이 노래를 부르면 나는 늘 동백아저씨라고 부른다.

그 사람이 이별의 슬픔을 얼른 벗어버리고 옛날처럼 씩씩해졌으면 좋겠다

 

 

 

동백아가씨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노래 Gm

 

1.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든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2.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 아가씨
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영화 포스터




당시 발매음반

1960년 동백아가씨 영화 ost

"동백아가씨 이후에 이미자 있고 이미자 이후에 트롯트 있다" 고 할 정도로
우리 가요사에 있어 동백아가씨 (작사 한산도. 작곡 백영호. 노래 이미자)만큼 헤일수 없이 많은

사연을 그 속에 보듬고 있는 노래도 드물다.


그 자체로 곡절많은 현대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노래.
군사정권하에서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여야 했던 생채기를 간직한 노래.
해금으로 사회에 불기 시작한 민주화바람을 실감케 했던 노래. 동백아가씨 가 떠올리게 하는

단상들이다.


또 이노래는어려운 가정을 끌어가던 아미자씨가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취입한 노래다

1964년9월에 나온 이 노래는 이듬해까지 무려 1O만장이 넘는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당시의 1O만장은 지금의 1백만장보다 더놀라운 수치다.하루 몇백장에서 많게는 몇천장까지

수요가 몰렸지만 수동식기계로 하루에 3백~5백장을 겨우 찍어내던 지구레코드로서는 더이상감당할 수가 없었다.
동백아가씨〉때문에 다른 가수의 음반이 팔리지 않자 레코드점에선 끼워팔기도 성행했다.

〈동백아가씨〉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가수의 음반을 같이 구입해야만 가능했던 것 이다.

당시 가요계엔 〈밤안개>〈노란샤쓰의 사나이〉〈맨발의 청춘〉등 서구풍의 발라드와 재즈가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백아가씨〉의 등장으로 그 자리를 다시 트롯에게 물려줘야만 했다
〈동백아가씨〉가 공전의 히트를 누리게 된 것은 우선 그녀의 노래가 우리 민족의 정서에

잘 어울린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노래는 가창 양식과 가사와 선율 화성 등 여러면에서

한국화에 상당한 성공을거두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초 국내에 유입된 일본 엔카는 단순히 노랫말만 바뀐채 불려졌다.

그러나 〈동백아가씨〉는 국내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게다가 우리의 전통민요나 판소리같은

가창양식 을 자연스럽게 도입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트롯의 원류가 일본 엔카니 아니니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음악전문가들의

책상위에서나 다루어질 문제일뿐 노래를 듣고 즐기는 서민들에겐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대중음악은 말 그대로 대중의 슬픔을 대신, 혹은 함께 울어주고 대중의 기쁨을 함께 웃어주면

그만이다. 유행가를 앞에두고 예술성이 떨어지느니 상업성에 너무 치우쳤느니 갑론을박하는건

지식의 사치일줄모른다

〈동백아가씨〉는 그런 면에서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성공한셈이다.

이 노래를 부른 이미자는 또 어떤 가수인가 우선 그녀는 잘생긴 외모도 아니다.

그렇다고 매너가 세련된 것도 아니다.
어쩌면 노랫가락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게 간단한 몸짓도 좀 보이련만 그것마저도 없다.

그러나 그녀의 외모에는 삶에 대한 갖가지 애환과 그 애환에서 배어나는 애잔한 연민 같은것이

자리잡고 있다.

슬픈 듯 따뜻한 눈빛, 부끄러운 듯 다소곳하게 움직이는 입술.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떠나버린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인, 부모를 그리는 효심, 부모잃은 동생들을 돌보는 누님의

모습이다. 그녀 얼굴엔, 그녀 목소리엔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가장 적절한 삶의 편린들이

하나 가득,그리고 잔잔히 고여있다.


〈동백아가씨〉가 아마도 요즘처럼 tv며 콘서트며, 게다가 ·CD까지 판을 치는 세상에 태어났다면

그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미자의 얼굴 덜 세련됨으로는 말이다.
이미자의 목소리는 무기다. 목소리의 위력이 가장 잘 살아나는건 역시 라디오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나오기 직전 민간 라디오 방송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결국

<동백아가씨〉 인기를 부채질했다.


64년 7월 동명영화(감독 김기.주연 엄앵란 신성일)의 주제음악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동백아가씨 는 부산과도 각별한 인연을 간직한 노래로 기억 된다.


작사자 한산도(본명 한철주)씨와 작곡자 백영호씨는 각각 부산 부평동과 서대신동이 고향으로

이곳에서 해운대 엘레지 (58년)를 같이 만들어 발표했으며, 영화 동백아가씨 역시 부산 다대포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동명의 영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섬처녀인 그녀는 약초를 캐러 서울에서 내려온 한 대학생과 사랑을 맺고 임신까지 하게 된다.

그녀는 그를 찾아 서울로 올라간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가 외국유학을 떠난 뒤였다.

거리를 전전하던 그녀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아 동백빠아의 여급으로 나가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도 잊지 못해 하던 옛애인을 만난다. 하지만 그는 이미

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지금은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아이를 그에게 넘겨주고 다시 섬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 다대포에는 동백이 많이 피었다고 한다.

날이 좀더 추워져 두터운 외투차림의 한겨울이 오면 동백은

피빛보다 진한 그 농염하고도 뇌쇄적인 빛깔로 흐드러지게 핀다.

어째든 이런 동백꽃이 피어 밟힐 정도로 많았다던 다대포는

참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간직한 부산의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절경이자 생태자원의 보고였다



대부분 꽃은 질 때 꽃잎이 한장 씩 떨어지나 동백꽃은 꽃 전체가 통째로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짓밟힌 순결을 상징하며 노래처럼 사랑에 배신당한 비련의 여인과 비유되기도 한다.
프랑스 뒤마의 소설 춘희(椿姬)는 원래제목이 "동백꽃을 들고 있는 부인"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너무나 유명해진 비올레타가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으로 보아

서양인 들에게도 동백은 역시 비극의 꽃이었다.


동백나무는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늘푸른나무로서 다른 나무들이 활동을 멈추고

겨울넘기기에 여념이 없는 1-2월에 벌써 진초록 바탕에 타는 듯 붉은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래서 동백꽃은 예부터 시조나 노래가사의 단골메뉴이었다.

멀리는 동국이상국집에 동백화(冬栢花)라는 제목의 詩가 실려있으며,

고려 충숙왕 때는 채홍철이란 이가 동백나무 노래를 지어 죄를 면하였다 한다.

조선왕조 때는 동백 혹은 산다화(山茶花)라 하여 뭇 시인과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근세에는 미당 서정주와 신석정의 시에서 동백꽃이 상징하는 슬픔과 아픔을 읽게된다.


동백섬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30년이 넘게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던

고향의 정서가 노래속에 녹아있음을 작곡가 백씨도 부인하지 않는다.
30년이 넘게 그렇게 오랜동안 우리 가슴에 머물고 있는 노래이지만

동백아가씨 의 작곡에 걸렸던 시간은 놀랍게도 2시간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 동백아가씨 의 김기 감독이 한산도씨에게 작사를 의뢰한 것은 64년 4월.
영화의 줄거리를 압축한 가사가 퇴고를 거쳐 작곡가 백씨에게 넘겨지는 순간

영화제작사에서 곡을 받아든 백씨는 거침없이 악보를 오선지에 옮겨놓기 시작했다.


몇차례 기타를 튕겨보면서 떠오르는 악상 그대로를 정신없이,

그러나 만족스럽게 완성시켜놓고 보니 2시간만에 옥동자 동백아가씨 가 완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곡을 발표하기도 전에 제목이 촌스럽다며 우려를 나타내던 작곡가 선배들의 예상대로

지구레코드사에서 판을 내놓은 이노래는 처음에는 별 빛을 보지 못했다.
당연히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음반에서도 동백아가씨 는 타이틀곡을

최무룡이 부른 영화주제가 [단둘이 가봤으면 ]에게 넘겨주고 뒷면에 자리하게 되었다.


작곡가 백씨가 직접 레코드 5장을 옆구리에 끼고 다방을 돌아다니면서 DJ에게 애걸복걸하면서

한번씩 틀던 이노래는 그러나 좌중의 분위기를 압도하 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급격히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서울 명보극장에서 별 반응을 얻지 못하고 간판을 내려야 했던 영화 동백아가씨도

을지극 장으로 상영장소를 옮겨가면서 노래와 더불어 매진사례를 거듭해 나갔다.
당시 화폐가치로 3백30원이라는 결코 적지않은 금액이었지만 동백아가씨 L.P판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레코드사 앞에는 2일이 넘게 기다려서야 겨우 한장의 L.P판을 구입하고도 만족스럽게 돌아서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영화와 음악이 동시에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빅히트를 기록하던 동백아가씨 음반이

몇장이나 팔려나갔는지는 정확히 집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의 지구레코드사 사장 임정수씨가 최근 KBS 일요스페셜 에서 밝혔듯이 2백만장은 훨씬 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90년대 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김건모의 음반이 2백만장이 넘게 팔려

공식적으로 한국최고의 음반판매량으로 기록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60년대 당시 동백아가씨 의 인기가 어느정도였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거칠것없이 인기의 최정점에 자리하던 동백아가씨는 음반발매 2년만인 66년에

곡이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방송금지를 당하게 되고

70년에는 판매금지까지 당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가요관계자 4명과 클래식 음악전공자 6명으로 구성된 당시의 심의위원회가

판매금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실로 다양했다.

처음에는 가수 이미자의 창법이 소위 굴리는 식의 왜색이라고 했다가

이어 가사가 저속하다는 이유로,

급기야는 군사정권 당시의 최대무기인 색깔논쟁 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클래식음악전공자들의 대중가요 천시와 동백아가씨 의 거침없는 독주에

타레코드사가 담합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은

어쨌든 불후의 명곡을 방송금지 이후 21년동안이나 공식적으로 접할 수 없는

불행한 시대의 사생아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 여기서 왜 방송금지를 당했는지 직접 이미자 본인에게 들어보자


「동백 아가씨」가 세상에 나온 지 불 과 일년 만에 십만 장이라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大히트를 치는 도중에 금지곡 으로 묶였을 때 저는 놀랐어요. 어떻게 이 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리둥절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1967년에 「섬마을 선생 님」이 묶인데 이어 1969년 「기러기 아 빠」까지 금지곡으로 묶였을 때는 「아, 날 더러 노래를 하지 말라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죽고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방 송도 금지되고, 음반 제작과 판매도 금지되 고…. 누군가가 목줄을 죄는 기분이었어요.

몇 달 동안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 지 않았습니다.
가장 한심한 것은 금지 이유가 분명하지도 않고 사리에 맞지도 않다 는 점이었어요. 비록 저의 노래 중 가장 크 게 히트한 노래 세 곡이 모두 금지곡으로 묶이기는 했으나 무대에서는 여전히 저의 인기가 上終價(상종가)였습니다. 무대에 서 면 가는 곳마다 이들 금지된 곡들을 부르 라고 성화예요


저는 걸리거나 말거나 불렀습니다. 교포들 이 와서 판을 구해달라, 아니면 녹음 테이 프에

복사라도 하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어요.
이렇게 잊지 않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수의 생명을 끊을 수도 있는 딱지를 달고서 도 지금까지 저는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수들의 생명은 의외로 短命(단명)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22년 만에 해금된 「동백 아가씨」를 들고 데뷔 30주년 기념공연으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서니 그 많은 팬들이 기립하여 함께 노래를 불러 주셨어요. 팬들이 있는 한 노래는 사라지지 않고, 가수도 죽지 않습니 다. 그 때 저는 「이 힘으로 내가 살아왔구 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동백꽃 !!!
대부분 꽃들이 12월~1월 꽃눈속에 숨어 봄을 준비하고 있는 겨울에
우리나라 남쪽 섬 지방에서 한창 꽃망울을 터 뜨리는 꽃이 있다
이 꽃이 동백꽃 이다~~
마침 눈이라도 내리면 흰눈과 피처럼 붉은꽃잎, 샛노란수술,짙푸른 잎사귀
빚어내는 조화는 보는 이를 숨맏히게 할 정도이다.
동백나무는 한국,일본,중국이 원산지인 상록활엽교목 즉 늘푸른 넓은잎 키작은 나무이다
동양의 꽃나무인 동백[camellia japenica]이 서양에 소개된 예로 "뒤마의 소설"이자
베르디 오페라인 "라트라비아타[La traviata]가 있다.
그 주인공 "비올레타"가 번갈아 들고 나오는 "흰꽃과 붉은꽃"이 바로 "동백꽃"이다.
"라트라비아타"를 "춘희"라 하고 번역 하면은 "춘[椿]이 "동백"이란 뜻이다
"춘희"란 그래서 "동백아가씨"가 되는 셈이다.

동백꽃은 추운 겨울에 피는것 외에도 두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는 온대지방에서 보기드문 "조매화"의 하나 라고 하는데, 이새가 "동박새"이다.
동박새는 겨울에는 동백나무의 꿀을 먹으며 열매를 맺으면 열매를 먹고 사는 새 이다.
"두번째"는 꽃이 통째로 지는 모습이다
모르는 사람은 뭔가 잘못되어 떨어지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가장 아름답게 꽃이 핀
상태에서 마치 목이 부러지듯 툭하고 송이째 떨어진다.

동백나무는 추위와 건조에 매우 약하다
자생지인 남쪽 섬의 환경을 생각해 보면 알것이다
한겨울에도 5℃ 이상되야 겨울을 날수 있다.
화분에 심어져 있으면 방안에 들여 놓거나 비닐로 씌워 양지에 두어야 한다
또 흙표면이 마르면 바로 물을 주어야 한다
동백나무는 꺾꽂이로 번식 시킬수 있다
6~9월 중순에 가지를 꺾어 화분에 꽂아 두면 뿌리가 내린다

동백나무의 "동백꽃" 꽃말은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이라고,
그래서 혼례식에서 생명과 굳은 약속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동백은 우리넷 옛 생활속에 서 친숙한 꽃나무이다
씨앗에서 짜낸 기름은 머리결이 갈라 지거나 끊어 지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어
옛 여인내들이 머릿기름으로 사랑을 받아 왔으며 말린 꽃가루는 지혈 작용을 하고
타박상 화상 등에 사용된 가정 응급 약이 었다
나무 또한 재질이 단단해 얼래빛, 다식판,장기쪽등의 소재로 널리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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