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백 가지 채소가 배추만 못하다(百菜不如白菜)’.
예부터 배추는 귀한 채소였다. 배추의 영어 이름은 ‘Chinese Cabbage’. 7세기경 주로 화북 지방에서 재배되다가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파됐다. 우리나라에서 배추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236년(고려 고종 23)에 출간된 《한약구급방》이다. 약용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배추를 음식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중국 산둥 지방의 배추를 들여와 서울 왕십리에 심어 재배에 성공하면서다. 김치의 역사는 길지만 현재 한국인이 주로 먹는 배추김치의 역사는 짧다. 19세기 중반에야 통배추에 마늘과 고추로 양념한 배추김치가 등장했다. 우리나라 배추김치는 세계적인 음식으로 정평이 나 있다. 2006년 미국의 건강 잡지 〈헬스〉는 우리나라의 배추김치를 세계 5대 건강 음식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2012년 5월에는 우리나라 배추가 ‘김치 캐비지(Kimchi Cabbage)’로 국제 식품 분류에 정식 등재됐다.
김치의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향신료는 고춧가루다. 배추와 무, 젓갈류 등과 어울려 명품 김치를 만든다. 고추는 영양의 보고(寶庫)로, 비타민, 단백질, 섬유질, 칼슘, 철분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고추에 함유된 비타민 C는 감귤의 2배, 사과의 30배라고 한다. 고추의 비타민 C는 조리 과정에서 다른 채소류보다 손실량이 적은 것이 특징이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은 “고추를 먹지 못하면 혁명도 못한다”고 했다.
고추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탐험을 떠났다가 유럽으로 들여왔고, 그것이 다시 아시아로 전해졌다. 콜럼버스 일행은 멕시코 원주민들이 음식에 ‘아히(agi)’라는 향신료를 넣는 것을 보았다. 아히는 색깔이 붉고, 맛이 후추와 비슷해 ‘붉은 후추(red pepper)’라고 불렸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고추다.
한국인들의 고추 사랑은 유별나다. 매운맛은 고추의 특허다. 한국인은 통점(痛點)이 느껴질 정도의 매운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을 만큼 고추를 좋아한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고추 소스는 절대 빠질 수 없다. 매운 음식을 먹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개운하다’, ‘시원하다’고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붉게 익은 고추를 태양이나 불, 영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붉은 고추는 귀신을 물리친다고 해서 금줄에 달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매운 인도산 부트 졸로키아 고추는 토종 매운맛의 대명사인 청양고추보다 100배나 더 맵다. 이 고추를 먹으면 너무 매워서 귀신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고추는 너무 자극적이기 때문에 새들 말고는 대부분의 동물들이 멀리한다. 매운맛에 둔감하면서도 씨앗을 널리 퍼뜨릴 수 있는 새들에게 딱 적격이다.
고추의 독특한 매운맛을 내는 것은 캡사이신(capsaicin)이라는 알칼로이드 화합물이다. 캡사이신이 없는 고추는 ‘팥소(앙꼬)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다. 캡사이신은 껍질에도 상당량 들어 있지만 고추씨에 가장 많이 함유돼 있다.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고 혈류량을 증가시키는 한편 뇌신경을 자극해 엔도르핀을 분비시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또 침샘을 자극해 식욕을 돋우고 위산 분비를 촉진해 소화를 돕는다. 발암 억제 효과도 있는 것으로 밝혀져 항암제로 개발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산패를 막아주는 동시에 유산균 증식을 돕기도 한다. 비만 예방과 치료에 도움을 준다고 하며, 체지방을 줄여주어 다이어트에 좋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한국인은 언제부터 고추를 먹었을까. 고추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을 통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왜군이 독한 고추로 조선인을 독살하려고 가져왔다는 속설도 있다. 일본 전래설의 근거는 1984년 한양대 이성우 교수가 자신의 논문에서 ‘임란 이후 일본 전래설’을 주장하면서 통설로 굳어졌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고추가 일본에서 전래됐다고 해서 이를 왜개자(倭芥子)라고 불렀다. 영조 때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고추를 왜초(倭椒)라고 했다.
고추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들여왔다? 글쎄다. 의견이 분분하다. 중국에서 전래됐다는 설도 있고, 임진왜란을 전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고추가 다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여기에 기존의 통설을 뒤집는 주장이 나와 이목을 끌고 있다. 한국식품연구원의 권대영 박사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경란 책임연구원은 고문헌과 생물학적 분석을 통해 일본 전래설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임진왜란 발발 100여 년 전인 1489년에 간행된 《구급간이방》에 고추를 뜻하는 한자 ‘초(椒)’자와 고추의 옛 한글 표기인 ‘고쵸’가 명시돼 있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웠다. 권대영 박사는 이보다 앞선 1433년의 《향약집성방》과 1460년의 《식료찬요》에 나오는 ‘초장(椒醬)’이 고추장을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그는 더 나아가 “일본의 문헌에는 오히려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고추가 전래됐다는 내용도 있다”고 밝혔다.
고추는 생기를 불어넣는 마법의 양념이다. 고추를 가루로 만들어 김치라는 독특한 발효식품 문화를 창조해낸 것은 한국인이다. 한국산 고춧가루가 ‘글로벌 핫소스’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날이 머지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추는 일본에서 들어왔다? (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2012. 9. 24., 끌리는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