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도둑

U블럭 2018. 6. 17. 06:31


 


남들은 칠전팔기라는데 여덟번째 또 과거에 낙방한 임팔동은 목을 매 세상을 하직하려 나무에 새끼줄을 걸었다. 그러나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날이 새면 젖먹이를 업고 이 집 저 집 허드렛일 다니고 밤이면 삯바느질한다고 등잔에 이마를 찧는 무던한 마누라 얼굴이 떠올라 죽을 수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책을 모두 아궁이에 처넣고 불을 지르려는데 부인이 울며불며 막기에 임팔동은 주막으로 가 실컷 술을 마시고 터덜터덜 정처 없이 걸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원수 같았다. 쌀쌀한 밤공기에 술이 깬 임팔동은 팔판동 골목을 지나며 이를 악물었다.

“대궐 같은 이 집 주인들은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짰겠지.”

임팔동은 의적이 되기로 작정했다. 어느 집 뒷담을 넘어 툇마루 밑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폈다. 살며시 나와 별채 모퉁이를 도는데 컹컹 개소리가 들리더니 서너마리의 삽살개떼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임팔동이 걸음아 나 살려라 냅다 뛰는데 금방 바지춤을 물고 늘어질 것 같던 삽살개들이 갑자기 걸음을 늦추더니 비틀거렸다.

개 짖는 소리에 하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왔다. 그때 장독대 뒤에서 바람처럼 튀어나온 사람이 임팔동의 소매를 잡아끌었고, 둘은 장작더미를 타고 담을 넘어 도망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임팔동은 낙산 솔밭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쓰러졌다. 임팔동을 구해 준 사람은 숨도 안 차는지 바위에 앉아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뉘신지 모르지만 저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임팔동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위 위의 사람은 몸을 날려 임팔동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다 된 밥에 재 뿌려 놓고, 뭐? 감사하다고?”

그는 씩씩거리며 다시 바위에 올라가 담배를 빨았다. 임팔동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얼얼해진 볼을 감싸고 있는데 바위 위에 앉은 그 사람이 물었다.

“이대감댁 딸이 날 받아 놓고 혼수 장만하고 있는 것 어떻게 알았어?”

“전혀 몰랐습니다. 무작정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 길로 들어선지 얼마 됐어?”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는 혀를 차며 웃었다.

“이대감댁을 드나들던 장사치한테서 혼수가 어디 있는지 다 알아 놓고 오늘을 거삿날로 잡았는데 네놈이 다 망쳐 놨어.”

“그런데 어떻게 달려오던 삽살개들의 걸음을 딱 멈추게 했습니까?”

“그놈들 지금쯤 다 죽었을 거야. 내가 던진 독약 섞인 돼지고기를 먹었거든.”

임팔동은 과거에 여덟번 떨어진 얘기와 착한 마누라 얘기를 털어놓은 후 무릎을 꿇으며 자신을 제자로 받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또다시 바위에서 몸을 날려 임팔동의 싸대기를 갈겼다.

“젊은 놈이 뜻을 세웠으면 끝을 봐야지. 뭐, 도적이 되겠다고?”

그날 밤 그는 임팔동의 집까지 따라왔다가 삽짝 밖에서 돌아갔다. 그로부터 한달에 한번씩 쇠 부딪치는 소리에 잠이 깬 임팔동이 마루에 나가 보면 엽전꾸러미가 떨어져 있었다. 이듬해 임팔동이 급제할 때까지 그 일은 계속 됐지만 끝내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