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기독교 이야기

U블럭 2013. 10. 26. 15:56


전통적으로, 기독교 교회에서는 ‘삼위일체론’에 입각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며 그는 신앙의 대상이다”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리고 “구원이란 내세에서 지옥행을 면하고 천당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한 구원은 기독교의 신자가 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라는 교리가 신자들에게 강요되어 왔습니다.


특히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더욱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져 왔습니다. 이는 한국에서 근본주의(Fundamentalism) 성향의 교회들이 개신교계의 주류를 형성한 데에 연유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유래한 근본주의 성향의 교파들은 한국 개신교계에서만큼은 주류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근본주의의 신봉자는 미국에서도 전체 개신교인의 1/4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외에는 캐나다와 호주 등 앵글로-색슨계 국가들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정도이고 유럽 대륙에서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이 개신교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는 지구상에서 한국이 거의 유일합니다. 현대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학문적 수준을 인정받는 신학자 중 그러한 근본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19세기 이후 기독교가 진화론을 비롯한 자연과학의 발달과 타종교와의 접촉, 그리고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의 발전 등의 요인으로 인하여 새로운 관점을 정립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오히려 기존의 도그마에 철저하게 매달리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신봉해 온 교리가 타당하지 못한 것이었을 가능성’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 스스로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까지 신봉했던 교리들이 만고불변의 절대적 진리이며 반드시 그 교리들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증거하고 있다”라고 강변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성서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신자들에게 강요하게 되며, ‘축자영감설’과 같은 타당성이 없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근대 이후 신학계에서 서기 1세기에 팔레스타인 땅에 활동하였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역사적 예수의 실제 모습은 전통적으로 기독교 교회가 주장해 왔던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상’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예수는 최소한 자기 사역의 후반기까지는 스스로를 ‘메시아’로 선포하지 않았고(그가 메시아로서의 자의식(自意識)을 가진 적이 아예 없다고 보는 연구자들도 많습니다), 자신의 추종자들이 하나의 제도적 조직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는 종교를 창시하려 하지도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민족들의 지배를 받고 있던 구약 시대 후반기 이후로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강성하게 해 줄 구원자의 출현을 고대해 왔고, 이 구원자를 ‘메시아(본래 히브리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며, 왕에게 붙이는 칭호였습니다)’라 불러 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이 ‘기름부음 받은 자’를 그리스어(헬라어)로 번역한 ‘그리스도(Christos; 영어로는 Christ)’라는 칭호를 예수에게 붙여 왔고, 유대교에서 말해 왔던 ‘메시아’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여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인 예수에 대한 칭호로 사용하여 왔습니다.)

유대인 하층민 출신이었던 예수는, 오히려 유대교 영성의 틀 안에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로서의 하나님의 섭리를 새로이 발견한 인물, 낡은 도그마에 얽매여 사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에 도달하는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 인물, 그리고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도록 해야 할 것임을 선포하는 인물이었던 것이죠. 즉 예수의 사역은 자기 자신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는 스스로를 ‘선포하는 자’로 여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선포한 메시지는, 근본주의 성향 교회들에서 말하는 것과는 달리 “나는 신(神)이며 나를 숭배하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신자가 되지 않으면 내세에서 지옥에 가게 된다”라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자신을 숭배하는 ‘특정한 하나의 종교’가 아닌, 이 땅 위에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4개 복음서 중 예수의 실제 모습을 상대적으로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들, 즉 마태-마가-누가 등 3개 복음서에서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규정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지만,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요한복음의 예수상은 실제 역사적 예수의 행적에는 거의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이러한 견해는 요한복음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4권의 복음서들은 ‘예수의 행적을 비디오 카메라에 담은 듯이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 나름대로가 받아들이고 해석한 예수상을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 언어의 본질적 기능은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점차 ‘교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형성하게 되면서, 교회의 신앙행태는 예수가 전파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보다 ‘예수’ 자체를 선포하는 것으로 변해 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고 그 틀에서 예수의 복음을 해석한 인물인 사도 바울이 이러한 흐름을 주도했는데, 서신서들에 나타난 그의 메시지는 철저하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역사적 예수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전파한 가르침의 내용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갖는 의의와 중요성 자체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직도 교조적인 유대교 율법의 틀에 얽매여 있던 상황에서 그 틀을 완전히 깨뜨릴 수 있게 하였으며, 그를 통해 기독교가 편협한 민족 종교의 모습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세계 종교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생애 전부를 복음의 전파에 바친 신앙의 위인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출현 이후 교회가 제도적 조직의 모습을 갖게 되고 오로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만이 강조되면서 정작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가 본래 전파했던 메시지는 주목받지 못하게 된 것이 분명하며, 이는 어떠한 측면에서는 유감스러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예수를 따르던 집단이 점차 예수를 그리스 문화권에서 흔히 나타나는 ‘신인(神人)’ 표상과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Logos)’ 개념이라는 틀에서 해석하게 되면서 ‘선포하는 자’였던 예수가 점차 ‘선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기독교 승인 이후 이른바 ‘교부철학’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의 교의가 그리스 철학의 틀에서 정립되는 현상은 가속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기독교의 신앙행태는 예수의 본래 메시지보다는 ‘신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각종 교리들에 중점을 두게 된 것이죠. 그리고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후 325년의 니카이아(Nicaea) 공의회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등이 정립되고 선포되면서, 기독교는 스스로를 ‘신으로서의 예수를 숭배하는 종교’로 규정해 왔습니다.


그리고 교리의 정립 과정에서 내세 문제가 강조되고 ‘구원’이 ‘내세에서의 지옥행을 면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가면서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가게 되므로 그러한 사람들을 하루빨리 우리 종교에 끌어들여 지옥행을 면하게 해 주어야 한다’라는 주장이 하나의 정언명령이 되어 왔습니다. 내세에 관한 이러한 교리가 정립되어 온 과정에 대해서는 제가 예전에 다른 답변에서 논한 바 있습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1&docId=48319439&answerNo=6 )


특히 개신교와 가톨릭을 포괄하는 서방측 교회 교리체계의 결정 과정에는, 초기 교부(敎父)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영어식으로 ‘어거스틴(Augustine)’으로 불리기도 하죠)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저서 『신국론(De civitate Dei; ‘하나님의 도성’ 또는 ‘신의 도성’이라고도 불립니다)』에서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enna)’이라는 이원론적 구도를 주장하고, 전자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후자는 빗나간 자기애(自己愛)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도성이 ‘진리로 빛나며 영원불멸하는 것’인 반면에 인류의 역사가 속하는 영역인 지상의 도성은 ‘결국 멸망할 운명에 처해 있는 유한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이러한 이원론적 구도를 받아들인 신앙인들은 예수가 선포했던 ‘이 세상의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이 세상의 역사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피안(彼岸)의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고, 이것을 ‘내세에서의 천당’과 연계시켰습니다.


전반적으로 고찰한다면, 기독교는 바울이라는 인물의 등장 후 교회라는 제도적 조직을 기반으로 존립해 왔고, 유대교의 토양에서 점차 벗어나 그리스 사상체계의 틀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교회가 국가권력과 결속하여 그 존립을 보장받고 교권이 강화됨에 따라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고, 교회가 정립한 ‘숭배 대상인 신적 존재로서의 예수상’과 내세지향적 신앙행태가 고착되어 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들 자체를 전적으로 ‘왜곡’으로 평가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든 결국 예수라는 인물의 삶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기독교를 유대교와 구별해 주는 정체성이 된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또한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틀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 사상체계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불가피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가 정립시켜 온 ‘숭배 대상으로서의 예수상’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도, 만고불변의 절대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어디까지나 역사적 발전과정의 산물이었다는 점입니다.


근대에 들어, 기독교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기독교의 경전과 교리 역시 다른 종교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형성된 상대적인 것임이 명확해지고, 신약학자들이 실제로 서기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했던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 그가 전파한 메시지는 후대의 교리와 신조를 통해 정립된 ‘신인(神人)으로서의 예수상’과는 상이한 것이었음을 말하게 되면서, ‘예수를 신(神)으로 숭배하는 종교만이 참된 종교이다’라는 주장의 타당성이 의문시되게 된 것이죠.


근대와 현대를 거치며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하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기독교가 ‘교회 밖에 구원 없다’라는 도그마에 집착하는 ‘예수를 섬기는 종교’보다는 예수가 이 땅에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고 그의 사역에 참여하는 ‘예수의 종교’로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종래의 틀에 박힌 내세지향적 신앙관에 대해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그러나 한국 개신교계의 경우 미국에서 유래한 근본주의 성향의 교회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종래의 관념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기되기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갖는 함의에 대해서는 좀더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할 듯합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제가 예전에 다른 답변에서 조금 논한 바가 있어서, 제가 썼던 그 답변의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docId=48631439&answerNo=1 )


19세기의 고전적인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단지 ‘사회적으로 도덕적 선과 정의가 실현된 상태’로 규정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 중 상당수가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러한 문제제기는 기본적으로 타당하다고 봅니다. 고전적인 자유주의 신학은,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하나의 사회적 운동과 어떤 차원에서 구별되는지를 충분하게 규명하지 못하였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공관복음서 내용 중 예수가 실제로 선포했던 내용과 후대 교회의 입장을 반영하는 내용을, 설득력 있는 근거를 통해 상당히 구별해 냈습니다(그 근거에 대해 논하는 것은 별도의 긴 설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것인지를 좀더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음을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전적으로 적절한 것인지는 의문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나님의 나라’, 영어로 ‘Kingdom of God’이라고 번역되는 것은 신약성서의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바실레이아 투 테우(Basileia tou Theou)’입니다. 그리스어 단어 자체의 의미만 놓고 본다면 영어로 ‘Kingdom of God’으로 번역하는 것이 물론 적절하지만, 예수가 실제로 사용한 언어는 그리스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와 유사한 계통의 언어인 아람어(아랍어가 아닙니다)이며 예수가 실제 사용한 아람어 표현은 ‘말쿠타 디스마야(malkuta dishmayya)’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말쿠타’는 의미상 ‘나라’처럼 특정한 영역을 지칭하기보다는 ‘지배’ 또는 ‘통치’를 의미하는 측면이 강한 단어이며, 따라서 최근의 신약학자들은 예수가 선포한 것을 ‘하나님의 나라’ 보다도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통치’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최근 독일어권의 신학자들은 ‘Herrschaft Gottes(하나님의 통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는 달리 ‘바실레이아 투 테우’가 아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Basileia ton Ouranon)’, 즉 ‘하늘의 왕국’ 정도에 해당되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것이 영어로는 ‘Kingdom of Heaven’, 우리말 성서에서는 ‘천국(天國)’ 또는 ‘하늘나라’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 ‘야훼(YHWH)’를 함부로 언급하기를 꺼렸듯이 하나님을 뜻하는 그리스어 ‘테오스(Theos)’를 언급하는 것을 가급적 피하려 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마태복음의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과 다른 복음서의 ‘바실레이아 투 테우’는 의미상 동일합니다. 개역판 성서를 읽는 한국인들이 마태복음의 ‘천국’이라는 단어를 ‘내세에서의 천당’쯤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데, 이것은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과거 다른 답변에서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가끔 사용했었는데, 이를 보고 “사회적-정치적 측면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는 것”이라 말한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저는 하나님 나라를 ‘내세에서의 천당’ 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는 듯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사실 하나님 나라의 최우선적인 함의가 사회적-정치적 차원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예수의 메시지에 있어서, 이 세상 자체를 변혁시키는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변혁시키는 것’이라 봅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통치’는 물론 흔히 생각하는 천당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단순하게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질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피상적인 견해라 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기존에 영위해 왔던 삶과 동떨어진 ‘내세의 천당’이 아닌 동시에, 기존의 삶과 세상의 상황을 단순히 변화시킨 것도 아닙니다. 기존의 삶, 그리고 세상의 기존 질서를 초월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라 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러한 입장은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입장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갖는 우선적인 함의는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예수가 전파한 메시지 중 가장 기본을 이루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아로부터의 해방’이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마태복음 16장 24절, 그리고 누가복음 9장 23절에 공통적으로 언급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한다”라는 말이 이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전통적으로 로마인이 사용하는 가장 끔찍한 처형 수단이었으며,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사람은 십자가의 가로대를 처형장까지 스스로 짊어지고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라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걷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물론 생물학적인 차원의 사망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이것이 내적 변화 과정에 대한 충격적인 은유적 표현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관심의 초점이었던 자아의 죽음, 그리고 자아의 안전과 정체성을 보장해 주기 위하여 자신이 의지하려 했던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기존의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찬 자아이며, 이러한 자아가 죽는다는 것은 허망한 집착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아에 대하여, 그리고 그 자아의 존립을 보장해 주던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궁극적 실재'를 접하고 구원을 얻는 데에 있어서 가장 먼저 장애물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 종교란 바로 이 자아를 깨뜨리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진정한 자아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 일시적이고 유한한 껍데기일 뿐이며, 그것을 부지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진정한 궁극적 실재와의 만남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죠. 신앙인이 새로이 거듭나는 것은 자아를 비우고 그 자아의 헛된 껍데기를 깨뜨릴 때에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아에서의 해방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인이 되는 데에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이루어야 할 일이라는 것이죠.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2장 후반부는, 자아를 부지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예수의 이러한 깨달음을 집약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마태복음 6장 28절과 누가복음 12장 27절에 언급된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은 차려 입지 못하였다”라는 말을 꼽을 수 있습니다. 결국 껍데기에 불과한 기존의 자아를 보존하는 데에 집착하고 그것을 위해 이런저런 수단에 의지하려 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무망하고 어리석은 일인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마가복음 10장 17-22절의 사례는 이러한 그의 메시지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기 개인의 영생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를 묻는 사람에게, 예수는 우선 당대의 상식에 맞게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계명들을 열거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계명을 모두 준수해 왔음을 자신있게 말하자, 예수는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게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대답하지 못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에피소드를 놓고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예수의 말 속에 담긴 깊은 함의를 놓친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는 그 사람이 ‘율법을 잘 준수해 왔다’라는 자신의 공적을 내세워 올바른 신앙인을 자처하지만 사실은 자아라는 틀에 철저하게 얽매여 있는 사람임을 간파하고, 자아를 보호해 주고 있는 수단인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는지, 그럼으로써 자아라는 틀 자체를 진정으로 깨뜨릴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예수의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무조건 재산을 모두 버리라고 강요하거나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의 말에 담긴 함의는, 인간이 자기의 재산을 지키는 일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에 매달리는 것 자체가 자아를 삶의 중심에 두고 그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역사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가 스스로 경건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 당대의 종교인들을 질타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아의 틀에 얽매여 있으면서 그것이 스스로를 올바른 신앙인으로 만들어 준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었죠. 누가복음 18장 10-14절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모습을 대비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선행을 했기 때문에, 또는 어느 종교의 가르침을 신봉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고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하지 않아서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식의 믿음이야말로 진정으로 성숙한 종교인이 되는 데에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고 봅니다. 사실은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위하는 마음에서 이러한 신념에 집착하는 것이죠(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수천당 불신지옥’같은 말이야말로 이러한 종교인들에게는 참으로 달콤한 약속일 것입니다).


사실 구약 시대 후반기 이후 유대인들의 신앙행태가 점점 이러한 인과응보의 원리를 신봉하고 하나님을 ‘눈을 부릅뜨고 인간의 행위를 감찰하는 심판자’ 정도로 여기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종교적 정체성에 있어서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당시의 유대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 유지에 집착하다 보니 이러한 관념에 집착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은 결국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나 행위가 ‘나에게 무엇인가가 주어질 근거’가 되는 한, 그리고 ‘나와 같은 의인들을 악인들과 구별해 주는 기준’이 되는 한, 자아라는 틀을 깨뜨릴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통치는, 이처럼 자아를 내세울 수 있는 방편과 자아를 보호해 줄 수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결국 자아에 대한 헛된 집착 자체를 버리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5절, 누가복음 18장 17절, 마태복음 18장 3절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예수의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언명은, 바로 헛된 자아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궁극적 실재로서의 하나님과 마주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아에서의 해방’이 진정한 종교인으로 거듭나는 데에 있어서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은, 예수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수많은 신학자들, 그리고 석가모니와 역시 강조한 바 있습니다. 아널드 토인비 역시 “종교란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죠.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근본주의 성향의 기독교인들은 “우리야말로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가르쳐 왔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근본주의는 절대적인 진리 자체가 아닌 ‘진리에 대한 인간 나름대로의 증언과 해석의 결과물’인 특정 교리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신자들로 하여금 ‘나는 이러이러한 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니 올바른 종교인이다’라고 자위하게 해 주는 행태, 그럼으로써 진리 자체에 대한 진정한 접근을 가로막는 행태일 뿐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아로부터 해방되고 거듭나게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오히려 근본주의야말로 예수가 질타했던 누가복음 18장 11절의 바리새인의 모습과 가장 비슷한 신앙행태라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종교 전통으로부터 ‘이러이러한 것만 따르면 참된 신앙인이 된다’라는 틀에 박힌 교리를 배우고는, 그 교리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상태를 ‘참된 신앙인이 된’ 것으로 여기고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행태이니 말입니다.


(불자(佛子)를 자처하시는 분들 중, “우리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데 기독교인들은 신의 노예로 살고 자아를 포기하려 하는 것이 아니오?”라는 말을 하는 분들이 간혹 있더군요. 그러한 지적은 근본주의자들에게는 해당될 수도 있겠지만, 예수가 강조한 ‘자아로부터의 해방’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석가모니가 말했던 무아(無我; anatman)의 경지야말로 예수의 메시지와 상통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가 선포한 메시지는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가 개인적-내면적 차원의 문제에서 그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메시지는, 경직되는 수준을 넘어 화석화되어 버린 기존의 종교적 전통에 대한 도전을 통하여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예수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시대의 유대교는, 매우 복잡한 율법을 특징으로 하는 종교였으며(물론 지금의 유대교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정결 관련 규정과 사회적 차별, 그리고 사제 계급의 권위를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 정체성의 위기를 겪어 왔다는 점, 그리고 그 정체성의 위기를 종교를 통하여 극복하려 했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전통이 도그마가 되어 가면서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예수는 이러한 당대의 종교적 전통을 뒤엎고, 유대교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당대의 종교적 전통이 ‘거룩함’을 도그마로 만들어 각종 규범을 통해 사회 구성원 간의 차별과 특정 계층에 대한 천대 및 배척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부추기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 하였습니다.


실제로 공관복음서들은 예수가 세리, 사마리아인, 창녀, 병자(복음서에 ‘문둥병’으로 언급된 것은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현대의 ‘한센병’과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병을 가진 사람들이 배척의 대상이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등 배척당하는 계층의 사람들, 즉 아웃캐스트(outcast)로 취급되는 사람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극도로 엄격한 정결 규정에 얽매여 있던 당시의 유대교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포용한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병자들이 배척의 대상이 된 것은 단순히 그들이 전염병을 옮길 수 있다는 것 때문이라기보다, 종교적인 차원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세미나의 회원 중 한 명이며 현대의 대표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자 중 하나인 존 도미닉 크로선은, 이를 정치적인 몸(the politic body)라는 용어로, 구체적으로는 ‘전체 사회의 소우주로서의 몸’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다른 문화에 완전히 흡수되어 정체성을 상실할 위험에 대하여 사회 지도자들이 극도의 경계심을 갖고 있을 때에, 정체성 유지를 위한 경계선을 상징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신체적 상태를 기준으로 경계선을 설정하는 데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는 현대의 문화인류학적 연구 결과와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1-14장에 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세한 정결 규정이 언급된 것은, 레위기를 비롯한 구약성서가 현재의 형태에 가깝게 편찬된 기원전 6세기 이후 유대 사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레위기 등 소위 ‘모세오경’을 실제로 모세가 기록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근본주의자들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결 규정은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복잡하고 엄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시대에 병자들에 대한 규정이 단순히 전염병 예방의 성격이 아니라 사회적 차별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현대인들의 그것과는 다른 고대인들의 관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예수는 깨끗한 자와 부정(不靜)한 자, 거룩한 자와 속된 자, 의인과 죄인을 철저히 구분하고 차별을 정당화했던 당대의 종교적 전통에 도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당대 유대 사회의 근본적인 체제 자체에 도전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정결 문제에 대한 기존의 율법을 사실상 무시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대의 상식을 어긴 것은 물론, 음식에 관한 정결법, 병자를 비롯한 아웃캐스트 계층 사람들과의 접촉을 제한하는 규정 등을 모두 어겼던 것이죠.


예수는 유대교의 이런저런 외적 규범들이 진정으로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며, 참된 종교인과 그렇지 못한 종교인 사이의 차이는 외적인 요건의 충족이나 규범의 준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오히려, 외적인 요건 및 규범에 집착하면서 마음 속에는 그릇된 우월의식과 완악함이 가득한 사람들을 질타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서 볼 수 있는 “사람 밖에서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라는 예수의 말이 바로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전통적 제사의식을 문제삼고 제사상에 올랐던 음식을 ‘우상에게 바쳐진 부정한 음식’으로 간주하는 한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예수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는 아웃캐스트 계층에 대한 차별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관한 규정 역시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 종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당대의 유대교에서 올바른 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안식일에 대한 규정 준수 여부를 자신들과 ‘거짓 신앙인’들을 가르는 징표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신앙생활의 본질이 특정한 제도의 준수 여부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러한 사람들을 강력히 질타했습니다. 물론 안식일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마가복음 2장 27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람이 안식일 규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메시지는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인간 나름대로의 해석의 결과물’인 특정한 교리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현대의 근본주의자들의 행태와도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하겠습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통치는, 가난한 자들과 아웃캐스트 계층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억압이 있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과 누가복음 15장 등에서 예수의 실제 메시지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구절들이 그러한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언급할 문제는, 이것의 성격이 ‘현재적’인가 ‘미래적’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예수의 진정한 메시지로 인정되는 구절들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통치의 미래성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해할 만한 구절들은 마가복음 14장 25절, 누가복음 13장 28-29절, 그리고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두 구절인 마태복음 6장 10절과 누가복음 11장 2절 등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면 현재성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해할 만한 구절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의 선포를 비롯한 많은 부분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영미권의 신학자들은 대체로 ‘현재성’에, 독일어권의 신학자들은 대체로 ‘미래성’에 초점을 맞춰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친 견해는 지양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메시지를 검토해 보건대, 현재성과 미래성은 융합되어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그 두 가지 사이의 이분법적인 구분 자체가 초월되고 있다고 봅니다(예수의 메시지가 갖는 미래적 측면을 말한다고는 해도, 슈바이처 등의 주장처럼 묵시문학적 종말론이 예수의 메시지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겨자씨나 누룩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묵시문학적 차원의 초자연적 종말은 아니며, 어떤 사람들은 깨닫되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상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겨자가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음에도 겨자는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난다는 것, 그리고 누룩이 레위기에서 볼 수 있듯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부풀어 오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죠.


하나님의 통치 역시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서서히 실현되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적이지만, 또한 미래에 가서 ‘완성’될 것이라는 점에서 미래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통치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논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지만, 저는 지금까지 언급한 예수의 메시지를 토대로 그 성격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일 수도, ‘그렇다’일 수도 있습니다.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신봉하는 형태의 종말론, 즉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세상에 개입하여 세계의 역사를 물리적으로 끝내실 것이다”라는 식의 믿음은 설득력이 없다고 봅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통치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시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 과거의 질서를 초월하고 그 질서에서 나타났던 악순환을 극복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통치는 일차적으로는, 과거에 자신이 섬기고 의지해 왔던 자아라는 틀로부터 해방되고 궁극적 실재 하나님에게 스스로를 완전히 맡길 수 있는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종전 세계의 질서와는 명백히 구분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탐욕과 무지(불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 석가모니가 말한 ‘무지’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 용어를 다른 종교인들을 깎아내리는 데에 있어서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무지라는 용어는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용어입니다), 그리고 다툼과 억압, 증오가 팽배해 있던 과거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죠.


이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 각 사람은 자아라는 울타리를 허물고 서로를 포용할 수 있게 되며, 동시에 그 울타리가 가로막아 왔던 궁극적 실재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바로잡힐 수 있게 되는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거추장스러운 종교적 제도나 성직자의 권위가 궁극적 실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합일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일도, 사람과 사람 차이의 차별과 편가름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 사회적-정치적 정의의 측면은 가장 우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각 사람이 자아로부터의 해방을 실현할 때에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적 질서를 변혁시키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하되, 개개인의 새로운 깨달음에 뒤따르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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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질문에서 언급하신 ‘도마복음(Gospel of Thomas)’, 즉 ‘토마스의 복음서’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합니다. 이것은 1945년에 이집트의 나그함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된 문서들 중 하나입니다. 나그함마디 문서들은 대체적으로는 영지주의(Gnosticism; ‘그노시스주의’라고도 합니다. 그노시스(Gnosis)는 ‘지식’ 또는 ‘깨달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입니다) 성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중에는 기독교에 직접 관련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섞여 있습니다. 도마복음 역시 영지주의 문헌 중 하나로 분류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도마복음의 영지주의적 성향을 강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의 사역 이전부터 정립되어 온 사상체계이지만, 초기 기독교의 일부 분파는 이 영지주의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아주 복잡하게 발전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유대교와 페르시아 종교, 그리스 철학 등에서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세상과 물질, 육신에 대하여 적대적 태도를 취하고 영적 세계를 숭앙한다는 점을 기본적 특징으로 하였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악한 것으로 간주하여, “완전하고 선한 최고신과는 다른 불완전하고 악한 신인 데미우르고스(Demiourgos)가 이 세상의 창조자이며 구약에서 말한 ‘하나님’이다”, “육체는 불완전하고 천한 것이며 이에서 해방되기 위하여서는 일부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지식(그노시스)이 필요하다” 등의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기 2~3세기 이후로는 영지주의는 여러 가지의 종교 및 사상체계와 얽히면서 매우 잡다한 형태를 나타내게 되었으며, 영지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아주 첨예한 의견대립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영지주의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 너무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도마복음은 이미 말씀드렸듯 나그함마디 문서 중 하나였다는 점 때문에 영지주의 문서로 간주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분류가 그다지 타당하지 못하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나그함마디 문서들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영지주의 성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도마복음에서 영지주의와 유사한 요소는 ‘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 정도 외에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마복음이 지금의 형태로 정립된 것은 서기 2세기 중엽으로 보이지만, 그 근원이 된 자료들 자체는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상호작용이 본격화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내용 중 일부는 소위 ‘Q자료(독일어 Quelle에서 유래한 용어입니다)’라고 하는 예수의 어록(실제 예수의 선포 내용들을 상당히 충실하게 포함하였던)을 토대로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Q자료의 내용이 현존하는 도마복음과 유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마복음의 메시지는, 정경으로 받아들여져 온 4개 복음서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평가를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4복음서 중 공관복음서들, 즉 마태-마가-누가복음에 언급된 ‘하나님의 나라(또는 하나님의 통치)’의 본질은, 결국 도마복음의 그것과 상충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장소로서의 개념이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것은 ‘자아’라는 틀을 깨뜨리고 거듭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공관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본다면, 도마복음의 메시지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도마복음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설서로는 오강남 교수의 『또다른 예수』를 꼽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해설이라는 것 자체가 해설자의 주관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이 책의 내용 역시 절대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또다른 예수』는 권위를 인정받는 종교학자가 집필한 것이며 편향된 입장을 전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도마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김용옥 박사나 오쇼 라즈니쉬 등도 도마복음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담은 책을 내놓은 바 있지만, 이들의 저서들은 그 내용이 너무 장황할뿐더러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편향된 주장을 담고 있어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편 서기 2~3세기 이후 ‘복음서’라는 명목으로 기록된 문서들 중에는 도마복음과는 달리 명백하게 영지주의 문헌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그 함마디 문서들에도 이러한 ‘영지주의 복음서’들이 여럿 포함되었습니다. ‘진리복음(Gospel of Truth)’과 ‘빌립복음(Gospel of Philip)’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지주의적 문서들은 기독교 주류파에서 정경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질문자님께서는 안티기독교 사이트 등에서 흘러나온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예수를 신격화하는 데에 지장을 주었기 배척된 것이다”라는 주장을 접하신 듯한데, 사실 영지주의 복음서 문제는 그처럼 간단하게 논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초기 교회에서 주류파 신앙인들과 영지주의파 사이의 대립이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온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레나이우스(Irenaeus) 등 주류파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영지주의 성향의 복음서들을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이에 따라 주류파 신앙인들이 영지주의 복음서들을 읽거나 배포하는 것을 금기시하게 되었던 사실 또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편협한 교파주의의 발로’ 정도로 여겨서는 곤란합니다.


영지주의는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 그리고 예수의 정체성 등의 문제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기독교와는 양립할 수 없는 사상체계였으며, 초기 기독교가 영지주의와의 혼합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한 것은 어떠한 측면에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3세기 이후 기독교 내의 영지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그리스도는 비천하고 악한 영역인 육체에 머무를 수 없는 고귀한 존재였으므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도, 십자가에서 실제로 고통을 당하고 처형된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역사적 예수의 실체 자체를 왜곡시키는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영지주의는 엘리트 계층 사이의 비의(秘儀)종교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통치’의 본질과는 전혀 부합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터넷상에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통치 수단으로 삼게 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 영지주의 복음서들을 읽거나 유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라는 식의 주장도 종종 볼 수 있더군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 397년의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약성서의 목록이 현재와 같이 확정되고 그에 속하지 않는 복음서들이 배척의 대상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훨씬 전인 서기 2세기 후반에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이미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에게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어떠한 측면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영지주의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비난을 가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영지주의는 어떠한 측면에서는 초기 기독교 신학의 발전에 대한 자극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영지주의를 통하여 자신이 직면한 실존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결국 비뚤어진 신앙행태를 정당화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킬 가능성을 안고 있는 사상체계였으며, 기독교가 영지주의와 융합하였다면 절대 그 생명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덧붙이는 글 :


최근에 우리 나라에서는 인터넷을 통하여 ‘도마복음과 다른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문헌들이며, 그 때문에 정경에서 제외된 것이다’, 또는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예수를 신격화하는 데에 지장을 주었기 배척된 것이다’ 등의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는 듯한데,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영지주의는 아주 잡다한 종교와 사상들의 혼합으로 형성되었으며, 영지주의에 영향을 준 중동 종교의 일부 요소들이 불교 등의 인도 종교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은 언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와 불교의 명확한 연관성은 학문적으로 입증된 바는 없습니다. 그리고 도마복음과 불교의 연관성은, 권위를 인정받는 성서학자나 종교사학자들 사이에서 특별한 논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인터넷상에서는 “예수는 젊은 시절 인도에서 불교를 배웠으며 도마복음의 내용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는 “신약성서 복음서들의 내용은 불경에서 따 온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종교사학적으로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최근의 종교사학계에서 이 문제가 특별히 이슈화되고 있는 것 역시 아닙니다. 사실 일부 사람들이 ‘복음서와 불경 내용 간에 관계가 있다’라는 주장을 줄기차게 해 온 것은 19세기 이래 항상 마찬가지이며, 종교사학계에서 그러한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역시 19세기 이래 지금까지 마찬가지입니다(1945년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으로 새로이 이슈화된 사안 역시 ‘이 문서들과 불경의 관계’는 아닙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나 루돌프 불트만 등 종교사학이나 신약학의 권위자들은, 복음서와 불경의 관계에 대한 그러한 주장을 받아들인 바 없습니다.


최근에 국내에서 그러한 속설이 자주 언급된 것은 민희식씨의 『법화경과 신약성서』라는 책에서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는데, 민희식씨는 앞서 말씀드렸듯 한양대 안산캠퍼스 불문과 교수를 지내다가 정년퇴직한 문학 전공자이며, 종교학 분야의 전문 연구자가 아닙니다. 『법화경과 신약성서』의 내용 자체도 억지스러운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민희식씨에 대하여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학자”라거나 “저명한 고고학자”라는 허위 소문이 유포되고 있고, 이를 그대로 믿는 네티즌들이 많더군요. 그는 사실 여러 권의 프랑스 문학작품들을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점 외에 특기할 만한 점이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말년에 관심분야의 폭이 넓어져서 종교사나 한반도 정세 등의 분야에 대하여서까지 자기 주장을 담은 책들을 내놓고 있는데,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 사람의 일방적인 주장에 그다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역시 비전문가인 윤청광씨가 쓴 『불경과 성경 왜 이렇게 같을까』(인터넷상에 돌아다니는 글 중 홀거 케르스텐, 라다크리슈난, 빈터니츠, 캐린 듄 등의 사람들을 언급한 글이, 바로 이 책을 출처로 한 것입니다)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예수회

2차대전때 했던 내용이 없네요.

예수회회의 설립과 역사「Awake잡지」 스페인 통신원 기

예수회는 스페인 사람인 창립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지은 수도회 이름이다.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이 “제수이트”라는 말을 만들어 냈는데, 이 이름이 영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문자적으로 “하느님의 일”에 해당하는 라틴어에서 나온 말이다.

1928년에 스페인에서 가톨릭 사제 호세 마리아 에스크리바에 의해 창립된, 주로 엘리트 가톨릭교인으로 구성된 단체다.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약(和約)에서 라틴어로 쿠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기오(자신의 종교를 자기 영지에서)라고 정의된 규약이 제정되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선교사들을 따라 들어올 것이라는 위협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의 쇼군 히데요시는 많은 예수회 및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을 처형하였다. 필리핀과 일본의 자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을 정복하려던 예수회의 책략은 일본에서의 예수회의 저의를 더욱 의심받게 만들었다. 1614년에 내려진 공식 금지령에는 가톨릭의 목표가 “정부를 전복시켜 나라를 점령”하는 것이라는 우려가 단적으로 표명되었다

제수이트(Jesuit) 수도회 즉 예수회는 결코 자유 방임적이라는 평판을 얻고자 한 적이 없었다. 1540년에 예수회의 설립을 제정한 교황의 교서는 “신전(神戰) 교회의 규칙”이라고 명명되었다. 당시, 종교 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이 새로운 싸우는 수도회는 가톨릭을 옹호하기에 안성맞춤인 것 같았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추종자들에게 “십자가의 기치 아래 ··· 싸우라”고 촉구하는 한편,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라’고 교시하였다. 예수회 수사(修士)들은 후자를 준수하면 전자를 더 잘 달성할 수 있으며, 융통성이야말로 많은 문을 열 수 있는 비결이라고 믿었다.

오래지 않아서, 융통성 있고 학식 있는 예수회 수사들은 교사이자 정치가, 조신(朝臣)이자 고해 사제로 일하도록 요청받았다. 그들은 로욜라가 의도한 바를 넘어선 것 같다. 여러 분야—특히 정계—에서의 성공은 그들에게 부와 권력을 가져다 주었지만, 재앙의 씨도 뿌렸다.

1773년에,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하여, 예수회를 “영원히” 해산시켰다. 동기가 무엇이었는가? “교회 내에 지속적인 진정한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예수회 수사들이 자체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부담스런 존재가 된 것이다. 교황의 이 결정이 41년 후에 철회되긴 하였지만, 예수회는 결코 이전의 탁월함을 되찾지 못했다.

오늘날, 회원수가 세계적으로 2만 3000명에 달하는 예수회는 아직도 해방 신학이든 사제의 정치 참여든 출산 조절이든 간에 가톨릭의 논쟁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교황의 불쾌함을 사게 되었다. 1981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기 측근을 예수회 총장으로 임명하려고 예수회의 선거 절차를 얼버무려 넘겼다.

최근 몇 해 동안, 교황은 교회의 보수 옹호 세력으로 오푸스 데이의 신봉자들에게 점차 의존해 왔다. 그렇지만 예수회는 평범한 가톨릭 수도회가 아니다. 그들이 심지어 가톨릭교인 내에서도 언제나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회라는 그 이름에 맞게 행동하고 있는가? 정확히 말해서 그들의 사명은 무엇인가?

사명을 띤 추종자들

시초에 로욜라의 의도는 그의 작은 집단이 성지(聖地)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16세기의 사건들은 그들에게 다른 방향을 제시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분립이 로마 교회를 약화시켰으며, 동양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들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회는 이중적인 사명—그리스도교국 내의 “이단”과 싸우는 일과 선봉에 서서 비가톨릭 세계를 개종시키는 일—을 택하였다. 그들 스스로 설정한 임무는 광대한데 그들의 수는 적었다. 그래서 로욜라는 예수회 수사들을 모두 철저히 훈련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네 가지 예수회 서약을 제정하고, 수련사가 밟아야 할 영적 수련 과정을 입안하였으며, 규율집 즉 예수회 행동 강령을 작성하였다. (네모 참조) 교회에 대한 절대 복종이 그들의 좌우명이었다. 로욜라의 초기 추종자들 중 한 사람인 프란시스 사비에르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교회에서 금한다면 나는 복음서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사명을 수행하는 데 거칠 것이라고는 없었다. 로욜라는 추종자들에게 “어디서 영혼을 발견하든지 그들을 위하여 싸우고, 여러분의 재량껏 무슨 수단이라도 쓰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재량껏 쓸 수단이란 무엇이었는가?

프로테스탄트의 확장을 막는 일

교육과 고해 제도는 점증하는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싸우기 위한 예수회의 주무기였다. 거의 우연히도, 그들은 새로 설립한 수준 높은 학교들이 어떤 전파 운동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왕들과 귀족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주입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16세기에는 바로 귀족 계급이 그들의 영지 내에서 종교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로욜라 자신이, “로마의 대의를 촉진하는 데 수도회가 올릴 수 있는 성과는 전파 활동보다는 우리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에 더욱 달려 있다”고 지적하였다. 엘리트 예수회 학교에서는 장차 유럽의 통치자들이 될 많은 사람들을 교육하고 교화시켰고, 그들은 집권하기만 하면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을 압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초기의 성공에 한몫 기여한 것이 새로운 고해 방법이었다. 역사가 폴 존슨은 이렇게 설명한다. “고해 마련 안에서, 예수회 수사와 유력한 고해자간에는 변호사와 고객간의 관계가 있게 되었다.” 이 새로운 방법이 더 보편화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유럽의 여러 군주들이 예수회 수사를 개인 전속 고해 사제로 삼았다. 이 고해 사제들은 그들이 조언을 베푼 유력한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모양이 되는 면에서 탁월하였다.

예수회 고해 사제들은 도덕 문제에 있어서는 너그러웠지만, “이단”을 다룰 때는 냉혹하였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 전속 예수회 고해 사제는 “품위를 위하여” 왕의 침실과 정부의 침실 사이에 비밀 계단을 설치하도록 권하였다. 한편, 그의 증조부인 루이 14세는 전속 예수회 고해 사제에게 설득되어 낭트 칙령(프랑스 프로테스탄트인 위그노파에게 제한된 숭배의 자유를 허용한 법)을 폐지하였다. 이 조처가 취해지자 위그노파에 대한 테러의 물결이 봇물처럼 터져, 많은 살육이 자행되었다.

폴 존슨은 저서 「그리스도교사」(A History of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한다. “특히 예수회는, 가톨릭의 권익이 위기에 처할 때는 도덕 규범이 어떤 면에서 무시될 수 있다는 견해를 널리 받아들였다. ··· 예수회는 고등 교육을 받고 강한 동기를 부여받은 엘리트가 종교적 투쟁을 중요시한 나머지 도덕적 가치에 혼란을 일으킨 두드러진 사례였다.”

예수회는 이중적인 도덕관에도 불구하고—오히려 그런 이유로—반종교 개혁에서 핵심 역할을 하였다. 창립된 지 41년 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현재로선, 하느님께서 이단을 근절하도록 부여해 준 수단으로 귀 성수도회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 융통성은, 고위층의 영향력과 더불어 “이단”과 투쟁하는 데 효험이 있었다. 이 수단으로 개종자들도 얻을 수 있었는가?

예수회의 적응성

예수회는 유럽에서의 관례를 좇아 동양에서도 통치자들을 개종시키고, 그로써 신민들마저 개종시키려는 목표를 세웠다. 그들은 이 목표를 추구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라는 로욜라의 명령을 극단적으로 좇았다. 17세기에 인도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 로베르토 데 노빌리는 통치 계급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카스트 제도의 상위 계급인 브라만처럼 생활하였다. 그는 동료 브라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가장 낮은 신분인 불가촉 천민에게는 성채 즉 성찬용 떡을 막대기로 전달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주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로서의 재능으로 인하여 중국 조정에서 영향력 있는 조신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명나라 조정에서 그의 예수회 후임자인 요한 아담 샬 폰 벨은 대포 제조 공장을 세우고, 중국 군대에게 (가톨릭 “성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대포를 조작하는 훈련을 시키기까지 하였다. 예수회는 개종자를 얻기 위하여 중국 가톨릭교인들에게 조상 숭배를 계속하도록 허용하였다. 이 결정은 논란을 일으켜 결국 교황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처럼 허용해 주었어도, 인도에서건 중국에서건 통치자들은 개종하지 않았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식민지식 접근법이 시도되었다. 식민지화되지 않은 내륙 지방에서, 예수회는 자치촌들을 세웠고, 거기에서 과라니 인디언들은 다분히 예수회 선교사들의 다스림을 받았다. 그 대신 그들은 농업, 음악, 종교에 관하여 배웠다. 이 자치촌은 번성기에 원주민이 10만 명에 달하였는데,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상업 이권 투쟁에 말려들게 되었을 때 와해되고 말았다. 예수회에서는 인디언 3만 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훈련시켜, 포르투갈과 적어도 한 차례 대전을 벌이게 하였지만, 1766년에 그 자치촌은 무너지고 예수회 수사들은 추방되었다.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예수회 수사들은 가톨릭의 소식을 널리 전하기 위하여 영웅적인 희생을 치렀다. 일부는 특히 일본에서 수고한 보람도 없이 끔찍한 방법으로 순교당하였다. 그 곳에서도 그들은 쇼군이 활동을 금지하기 전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예수회 수사들에게 열심과 희생 정신이 있었지만, 세계를 개종시키려던 노력은 주로 그들의 책략적인 방법으로 인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정치적 복음

과거에 많은 문제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예수회는 정치를 정치인에게 맡기기를 꺼리는 것 같다. 그렇긴 하지만 정반대로 바뀐 한 가지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여러 세기 동안 보수 우익 정부를 지원해 온 예수회가 오늘날에는, 특히 개발 도상국에서 활동하는 경우, 다분히 혁명 운동을 후원하는 것 같다. 바로 그러한 예가 니카라과다.

산디니스타 민족 해방 전선이 니카라과에서 집권하게 되자, 그들은 페르난도 카르데날과 알바로 아르궤요, 두 저명한 예수회 사제의 지지를 기대했고, 이들은 관직을 받아들였다. 아르궤요는 자신의 정치적인 직위를 옹호하는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 “혁명에 가담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니카라과에 있다면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또한 혁명가가 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정치적 복음이 많은 진실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지난 1930년대에, 스페인의 유명한 철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 이 후고는 예수회의 정치 개입이 예수의 가르침에 상반된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예수회는 ··· 흔히들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주의 왕국에 관한 이야기에 영합하여, 그 정치 이념으로 정치, 경제 및 사회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 그리스도는 사회주의나 사유 재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그분은 자신의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교리 분야에서도, 오늘날의 예수회는 혁신적인 경향을 띤다. 미국의 저명한 예수회 수사 마이클 버클리는 여성 사제에 대한 바티칸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엘살바도르에서, 욘 소브리노는 해방 신학과,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신학 해석의 개념”을 옹호하였다. 1989년에 예수회 총장은 예수회 수사 모두에게 피임에 관한 바티칸의 결정을 비판하는 일을 삼갈 것을 지시하는 서한을 발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회의 과거와 현재의 기록을 살펴볼 때, 그들이 문자 그대로 예수의 협회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예수의 협회인가?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15:14) 예수의 진정한 친구이며 제자라면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에게도 절대 복종을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사도 5:29)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복종하면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소식이 오용되고 정치성을 띠게 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회는 프로테스탄트와의 싸움에서 부분적으로 이겼다. 하지만 무슨 대가를 치렀는가? 성공을 좌우한 것은 이웃 사랑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책략이었다. 그들의 복음 전파 활동은 정치 이념과 야망으로 더럽혀진 복음을 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세상을 개종하러 나선 예수회가 세상의 일부가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바라신 것이었는가?

예수께서는 참 추종자들에 관하여,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7:16) 사도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사실이다. (고린도 전 9:22) 하지만 그것은 바울이 청중에 맞게 전하는 소식을 적응하였다는 뜻이지, 개종자를 얻기 위해서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 원칙을 타협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로욜라의 의도는 예수회의 수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로서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었지만, 이 이미지는 정치와 책략으로 인하여 흐려졌다. 그들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지만,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지는 않았다.—고린도 전 10:31.

예수회 수사가 되는 길

네 가지 서약. 처음에 청빈, 순결, 복종에 대한 세 가지 서약을 한다. 12년이 지난 후에, 예수회 수사는 네 번째 서약으로, “로마 교황의 모든 지시에 복종”할 것을 맹세한다.

영적 수련은 수련사의 마음에 예수회 대의에 평생 헌신할 뜻을 심어 주기 위한 4주간의 묵상 계획을 약술한 입문서다.

첫째 주에, 입문자는 지옥의 고초를—지각력을 총동원하여—상상한다. 둘째 주에는, 예수회에 입적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셋째 주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선명하게 묵상하는 데 바친다. 그리고 마지막 주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단계적인 지침이 베풀어진다. 예를 들어, 첫째 주에 수련사는 “지옥에서 나는 연기, 유황, 악취, 썩는 냄새를 맡”을 것과 “지옥불이 어떻게 영혼을 붙잡아 삼키는지를 느끼”라는 지시를 받는다.

규율집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작성한 규칙과 규례로 엮은, 탈무드 같은 책이다. 그 내용 가운데, 예수회 수사는 양손을 어느 위치에 놓는지,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왜 코를 찡그려서는 안 되는지 등등이 있다.

특히, 규율집에서는 예수회 수사가 상위자에게 절대 복종을 해야 함을 이렇게 강조한다. “하위자는 상위자의 수중에 있는 시체와 같다.”

출처 - 「Awake잡지」1992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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