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의 의미
판소리는 소리하는 이가 혼자 서서 몸짓을 해 가며 노래와 말로 긴 이야기를 이어가는 우리 전통 음악의 한 갈래이며 여기에는 북반주가 곁들여진다.
판소리는 순수한 우리말로 '판'과 '소리'의 합성어이다. '판'이란 '일이 벌어지는 자리'를 뜻하는데, 이것을 음악적으로 새긴다면 '사람(관중, 청중)이 모인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줄타기를 이르는 '판줄', 풍물에서의 '판굿' 등도 같은 용례이다. '소리'는 흔히 쓰이는 '소리 잘한다'라는 표현이나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김매기소리, 상여소리와 같은 말에서 그것이 '노래'와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다.
구성요소
판소리하는 이를 흔히 '가객'이나 '소리꾼'이라 이르며, 북치는 이를 '고수'라 한다.
판소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소리한다'고 하고, 말하는 것을 '아니리한다', 몸짓을 하는 것을 '발림한다'고 한다. 그리고 고수가 북을 치면서 알맞은 대목에서 "얼씨구, 좋다!" 등의 말을 외치는 것을 '추임새한다'고 이른다.
명창은 타고난 재주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름대로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명창이 되려면 창뿐만 아니라, 아니리와 발림도 잘 해야 한다. 노래하거나 이야기하면서 흥이 날때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도 다 발림이다.
사설의 형식과 내용
판소리는 노래로 하는 소리와 말로 하는 아니리가 섞여서 엮어진 극적인 음악이다. 그런데 그 사설을 보면 등장 인물의 대사뿐만이 아니라 장면의 해설까지 들어 있으니 '서사적인 음악'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는 말로만 엮인 것이 아니고 소리로도 불리기 때문에 사설은 산문체보다는 운문체에 가깝다. 사설을 그대로 적은 소리책 뿐만이 아니라, 사설을 따서 엮은 판소리계 소설도 또한 운문체에 가까운 점은 일반 옛날 소설이 대체로 산문체인 것과 대조가 된다.
판소리는 민중이 구경꾼이 되고, 광대가 연희자가 되어 출발했던 것이라 솔직하고도 해학적인 인간관과 미의식이 담긴, 서민들의 생활 이야기로 된 경우가 많다. 이 점은 판소리계 소설이 아닌 일반 옛날 소설의 내용이 흔히 충신ㆍ효자ㆍ열녀를 제재로 삼고,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기원과 발전
판소리가 언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마을의 큰 굿 끝에 벌이는 판놀음에서 놀이꾼들이 여러 놀이를 벌이는 동안에 소리 광대가 한 자리 끼어서 소리도 하고, 재담도 하고, 몸짓도 하며 긴 이야기를 엮은 데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판소리는 조선 왕조 전기에도 불렸을 것으로 짐작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이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판소리 사설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영조 30년(1754) 만화 유진한이 한시로 적은 만화본 <춘향가>이다. 이를 볼 때 적어도 숙종 무렵에는 판소리가 틀을 잡게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는데, 그때의 판소리는 길이도 짧고, 사설이나 음악이 소박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판소리의 예술적 수준이 높아진 것은 조선 말엽의 일이다.
유파
판소리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승되어 왔다. 전라북도에서 시작되어, 전라남도를 거쳐, 남해로 흘러들어가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의 운봉ㆍ구례ㆍ순창과 같은 곳에서는 동편제(시조 송흥록)가 많이 불렸는데, 씩씩하고 웅장한 것이 특징이다. 섬진강의 서쪽인 광주ㆍ나주ㆍ보성과 같은 곳에서는 서편제가 많이 불렸는데, 정교하고 감칠맛 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서편제의 한 유파로서 '강산제(시조 박유전)'라는 것이 있다. 경기ㆍ충청에서 많이 불리 것으로 '중고제(시조 염계달, 김성옥)'가 있는데 이는 책을 읽는 듯한 '송서제’와 비슷한 점이 많은 소리제로서, 소리의 높낮이가 분명한 것이 특징이다.
대체로 판소리의 유파 형성은 19세기 초반인 전기 8명창(박만순ㆍ송우룡ㆍ김세종ㆍ정춘풍-동편제, 장자백ㆍ이날치ㆍ정창업-서편제, 김정근ㆍ한송학-중고제) 시대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판소리가 명예와 부의 축적을 보증하는 예술이 되면서 광대들은 자신들의 법통을 강조하는 경향이 생겨나는데, 먼저 동편제와 서편제가 대립적으로 존재하였고 중고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동편제ㆍ서편제ㆍ중고제 등의 개념으로 나뉘는 것은 판소리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의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공연형태
판소리는 1인극이라 할 수 있다. 1900년대 중국의 창희나 일본 신파 연극의 영향을 받은 것 중에 '창극'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극장에서 여러 사람이 배역을 나누어서 연기를 하면서 부르는 형태로 이것을 판소리라고 하지는 않는다. 판소리계에서는 이 창극을 판소리의 '발전'으로 보지 않고, '변질’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옛날에 판소리는 집안의 큰 잔치에서나 마을의 큰 굿에서나 관아의 잔치 자리에서 흔히 불렸다. 판소리가 불리던 판놀음은 보통 큰 마당이나 너른 대청에서 벌어졌다. 먼저 줄꾼이 줄을 타고, 재주꾼이 땅재주를 넘고, 춤꾼들이 춤을 춘 뒤에 끝에 가서 소리꾼이 소리를 했는데, 판소리가 벌어지는 대목은 따로 '소리판'이라고 일렀고, 소리판이 벌어지는 곳을 '소리청'이라고 했다.
소리판이 마당이나 들에서 벌어지면 멍석이 깔린 위에 돗자리가 깔리고, 큰 마루에서 벌어지면 돗자리만이 깔리고, 그 둘레에는 구경꾼들이 삥 둘러앉는데, 한편에는 지체 높은 어른들인 좌상객들이 자리를 잡는다. 가객은 돗자리 위에서 좌상을 바라보고 서고, 고수는 북을 앞에 놓고 가객을 마주보고 앉는다. 가객은 두루마기와 비슷한 창옷을 입고, 갓을 쓰고, 손에 부채를 들고 서서 소리하되, 판소리 사설의 상황에 따라서 앉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몸짓도 하며, 우스운 말로 구경꾼을 웃기기도 하고, 슬픈 소리 가락으로 구경꾼을 울리기도 하며 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가객의 소리가 무르익으면 구경꾼들도 흥이 나서 '얼시구' 하고 추임새를 한다. 구경꾼들은 아침부터 날이 저물도록 또는 저녁부터 밤이 새도록 넋을 잃고 소리를 듣는데, 겨울철에는 눈이 내려도 밤새도록 자리를 뜰 줄 몰랐다고 한다.
장단
판소리에 쓰이는 장단은 크게 나누어 진양, 중몰이, 중중몰이, 잦은몰이, 휘몰이, 엇몰이, 엇중몰이가 있다. 이 장단들은 박자, 빠르기, 북치는 법이 서로 다른데, 판소리 사설에 나타나는 한가하거나 긴박한 상황에 따라 느린 것이나 빠른 것을 가려 써서 소리를 엮어 나간다.
북은 가객의 소리에 따라 치는 부분이 달라진다. 가객이 부르는 소리의 악절 첫머리에는 채로 오른편 가죽을 세게 치고, 가객이 소리를 밀고 나갈 때에는 채로 북통의 앞을 조금 세게 치고, 가객이 소리를 달고 나갈 때에는 채로 북통의 꼭대기 오른편 모서리를 가만히 굴려 치고, 가객이 소리를 맺을 때에는 채로 북통의 꼭대기 한가운데를 매우 세게 치고, 가객이 소리를 풀 때에는 왼손바닥으로 북의 왼편 가죽을 굴려 친다.
조
'조'는 가락의 짜임새나 꾸밈새나 모양새에 따라 지어지는 음악적인 특징인데, 우조, 평조, 계면조, 경드름, 설렁제, 추천목 따위의 종류가 있다.
서양 음악에서 대체로 장조로 된 음악은 기쁘고 명랑하고 씩씩하고 남성적이지만, 단조로 된 음악은 슬프고 어둡고 부드럽고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이렇게 장조로 된 음악과 단조로 된 것이 서로 다른 것처럼, 이들 조도 특징이나 그것이 자아내는 느낌 따위가 서로 다르다.
고수
판소리에는 반드시 고수가 있어야 한다. '일고수 이명창', '숫고수 암명창'이라는 말도 있듯이 판소리에서는 예로부터 고수를 중요하게 여겼다.
'고수'는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춰줌과 더불어, 고수나 판소리를 듣는 사람이 흥이 날 때 추임새도 넣는다. 고수나 판소리를 듣는 사람이 추임새를 잘하면 판소리하는 사람은 더욱 신이 나게 되는 것이다. 고수는 '(음악이) 넘치면 덜어주고, 모자라면 채워주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고수는 단순히 박자만 짚어주는게 아니라 판소리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끌며, 때로는 소리꾼의 상대역까지도 한다.
득음
판소리에서 소리의 최고경지에 도달한 것을 '득음(得音)'이라고 한다. 판소리의 창법은 표현력이 강하고 극적(劇的)인 소리를 내는데는 좋은 창법이지만 반면에 성대와 발성기관에 무리를 주기도 하여 초보자들은 목이 쉬고, 아랫배가 당기는 등의 신체적인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득음을 하기하기 위해 소리꾼들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오랜 기간 머물면서 '산(山)공부'를 한다는데, 연습과정에서 목이 쉬고 그리고 쉰 목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그런 후 아물고 또 다시 피가 터져 나오고 하는 그런 과정들을 겪는다고 한다. 또 목의 염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인분(人糞)삭인 물까지도 마셨다고 한다.
판소리 12마당
판소리에서는 작품하나를 '한마당'(마당이라 함은 소리ㆍ춤ㆍ놀이 따위를 헤아리는 데에 쓰이는 단위로 요즈음말로 '과장'과 같으며, '한판 논다', '한바탕 논다'에서와 같이 '판' 또는 '바탕'이라고 하기도 한다.)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정조, 순조 때는 그 종류가 매우 많았으며, 그 중 12가지를 골라 '판소리 12마당'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소리꾼들에 의해 완성되어 온 것이다. 현재 전창되고 있는 판소리는 5마당(춘향가, 수궁가, 심청가, 홍보가, 적벽가)이다.
'판소리 12마당'은 옛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데, 송만재(조선 순조때의 문인)의 <관우희>에 전하는 12마당을 보면 춘향가, 심청가, 홍보가(박타령), 수궁가(토끼타령.별주부가), 적벽가(화용도),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변강쇠타령(가루지기타령.송장가), 장끼타령, 강릉매화타령, 무숙이타령(왈자타령), 가짜신선타령 등이 기록되어 있다.12마당 가운데서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 등은 사설만 전해지고, 무숙이타령, 강릉 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은 사설조차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서 오늘날까지 소리가 남아 불리는 것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인데, 이것을 '판소리 다섯 마당’이라고 부른다.
판소리 12마당 외에 '숙영낭자전(가짜신선타령 대신 숙영낭자전을 판소리 12마당에 포함시키기도 한다)'이 있으며, 소설 두껍전, 옥단춘전, 괴똥전, 이춘풍전 등도 원래는 판소리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단가
판소리를 부르기 전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짧은 노래를 말하는데,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언제부터 불리어지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판소리의 사설이 긴 데 비해, 짧다는 뜻으로 '단가(短歌)'라 불렀으며, 옛날에는 '허두가'라고도 했다. 조선 중기에는 시조제로 부르는 노래 형식의 하나를 단가라고 하기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가객이 판소리를 부르기에 앞서서 부르는 짧은 노래만 그렇게 부른다.
단가는 소리판에서 두 몫을 담당하고 있다. 창자는 길고 힘든 판소리를 하기 전에 단가를 불러 목을 푸는 한편 성대의 상태를 시험하고 음정의 정도를 결정한다. 한편 청중을 환상의 세계 곧 판소리적 시.공간으로 끌어들여 즐거운 기분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소리판에 참여토록 하는 몫도 한다. 사설은 주로 강산풍경이나 역대 성군(聖君)이나 영웅호걸(英雄豪傑), 철인(哲人), 문장재사(文章才士), 절세미인을 그린 고사(古事)를 노래한 것들이 많으며, 음악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보통 장단에 대체로 부르기 쉬운 가락으로 짜여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단가는 거의 중몰이 장단으로 되어 있지만, 드물게는 <사창화류>와 같은 엇중몰이 장단이나, <고고천변>과 같은 중중몰이 장단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단가의 가락은 화평한 느낌이 드는 평-우조로 되는 것이 원칙이나, 요즈음 들어 계면조로 된 것이 더러 나왔고, 송 만갑은 평-우조에 경드름을 곁들여 부르기도 했다. 보통 속도로 2~3분에서 5분 정도까지 걸린다. 단가는 40~50여곡 정도가 있는데, 현재 전창되고 있는 것은 20여곡정도라고 한다.
단가는 판소리꾼이 아닌 일반 풍류객에 의해서도 불리어졌으며, 또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같은 곡이라도 다르게 불리어졌다.
북한의 판소리 (2001.4.30 조선일보 NK 리포트 발췌)
북한에는 판소리가 없다. 이는 전적으로 김일성 주석이 남도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판소리를 ‘쐑소리'(濁聲)라 하여 폄하한 데서 기인한다. 북한에서는 60년대 초 민족음악, 특히 민요의 발전방향을 놓고 내부적으로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논쟁의 초점은 민족음악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데 맞춰졌는데, 크게 서도창과 남도창으로 견해가 갈리고 있었다. 당시 북한 국악계는 남쪽 출신 예술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많은 예술인들이 6.25전쟁 때 북으로 들어가 국악계를 석권하다시피한 것이다. 이들은 창극 춘향전과 심청전, 배뱅잇굿 등을 무대에 올려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국악계를 장악하고 있던 남쪽 출신들은 남도창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본 바닥 출신들은 그들대로 서도창을 고집했다.
논쟁은 김일성이 나서 서도창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매듭지어졌다. 김일성은 64년 11월 문학예술부문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민족음악은 민요를 바탕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좋다고 지적하면서 서도민요가 바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판소리는 너무 옛날 것이기 때문에 흥미가 없다. 남도창은 양반들이 갓 쓰고 당나귀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 술이나 마시면서 앉아서 흥얼거리던 것인데 우리 시대에 맞지 않다. 판소리는 사람을 흥분시키지 못하며 투쟁에로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판소리로 군대 전투마당으로 달려나가게 할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남도창은 옛날 양반들의 노래 곡조인 데다가 듣기 싫은 탁성을 낸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발성법과는 완전히 모순된다. 조선사람의 목소리가 본래 아름다운데 고운 처녀가 쐑소리를 내는 것은 정말 듣기 흉하다"고 질타했다.
그의 이런 주장이 있고 난 후 북한 국악계에서 남도창과 판소리는 설자리를 잃어버렸으며 민족예술극장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렸다. 김일성은 판소리를 보존은 하지만 장려할 필요는 없다면서 "판소리하는 사람을 100명에 한 사람쯤 남겨두는 것이 좋다"고 말했지만 이미 대세는 판소리 일소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심지어 판소리를 연구하는 사람조차 지방으로 쫓겨나는 판이었다.
북한은 90년대 들어 민족예술극장을 부활시키고 국악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미 30년 이상 끊겨진 명맥을 지금에 와서 이을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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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가 지금은 흔히 극장놀음이나 방안놀음으로 벌어지지만, 옛날에는 판놀음으로 벌어졌다. '판놀음'이란 여러 패의 놀이꾼들이 너른 마당을 놀이판으로 삼고, '판을 짠다'하여, 순서대로 소리, 춤, 놀이 따위를 짜서 벌이는 것을 한데 묶어 일컫는 말이다. 판놀음으로 벌이는 놀음에는 '판'이란 말이 붙는다. 판놀음에서, 줄타기는 '판줄', 농악은 '판굿', 춤은 '판춤', 염불은 '판염불', 소고 놀음은 '판소고'라고 한다. 따라서 판놀음에서 하는 소리가 '판소리'이겠다. 그러면 '소리'는 무엇이며, '소리하기'란 무엇일까? "소리 한자리 해라", "소리를 잘한다"와 같은 예스러운 표현에서, 또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김매기소리, 상여소리와 같은 말에서 우리는 그것이 '노래' 또는 '노래하기'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판소리라는 말은 이 나라의 토박이말이다. 옛날에는 이를 잡가, 극가, 창가, 본사가 따위의 한자말로 쓰기도 했으나, 요즈음에는 그런 말들을 쓰지 않는다. 판소리하는 이를 옛날에는 창우, 가객, 광대 또는 소리꾼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일정하게 쓰는 말이 없다. 북치는 이는 고수라고 부른다. 판소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소리한다'고 하는가 하면, 말하는 것을 '아니리한다'고 하고, 몸짓을 하는 것을 '발림한다'고 한다. '발림이 좋다'는 말은 '너름새가 좋다' 또는 '사체가 좋다'라고도 한다. 그리고 북치는 고수가 북을 치면서 알맞은 대목에서 "얼씨구, 좋다!" 또는 "으이, 좋지!" 따위의 말을 외치는 것을 '추임새한다'고 이른다. |
옛날에 판소리는 집안의 큰 잔치에서나 마을의 큰 굿에서나 관아의 잔치 자리에서 흔히 불렸다. 판소리가 불리던 판놀음은 보통 큰 마당이나 너른 대청에서 벌어졌다. 먼저 줄꾼이 줄을 타고, 재주꾼이 땅재주를 넘고, 춤꾼들이 춤을 춘 뒤에 끝에 가서 소리꾼이 소리를 했는데, 판소리가 벌어지는 대목은 따로 ‘소리판’이라고 일렀고, 소리판이 벌어지는 곳을 ‘소리청’이라고 했다. 소리판이 마당이나 들에서 벌어지면 멍석이 깔린 위에 돗자리가 깔리고, 큰 마루에서 벌어지면 돗자리만이 깔리고, 그 둘레에는 구경꾼들이 삥 둘러앉는데, 한편에는 지체 높은 어른들인 좌상객들이 자리를 잡는다. 가객은 돗자리 위에서 좌상을 바라보고 서고, 고수는 북을 앞에 놓고 가객을 마주보고 앉는다. 가객은 두루마기와 비슷한 창옷을 입고, 갓을 쓰고, 손에 부채를 들고 서서 소리하되, 판소리 사설의 상황에 따라서 앉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몸짓도 하며, 우스운 말로 구경꾼을 웃기기도 하고, 슬픈 소리 가락으로 구경꾼을 울리기도 하며 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가객의 소리가 무르익으면 구경꾼들도 흥이 나서 “얼시구” 하고 추임새를 한다. 구경꾼들은 아침부터 날이 저물도록 또는 저녁부터 밤이 새도록 넋을 잃고 소리를 듣는데, 겨울철에는 눈이 내려도 밤새도록 자리를 뜰 줄 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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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판소리 열두 가지를 골라 열두 마당으로 꼽는 것은 꼽는 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조선 왕조 순조 때의 문인인 송 만재가 적은 “관우희”라는 글에는 판소리 열두 마당의 내용이 아주 간단하게 적혀 있는데, “관우희”를 학계에 소개한 국문학자 이 혜구는 이를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 <왈자타령>, <강릉 매화전>, <가짜 신선 타령>으로 밝혔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 때에 정 노식이 쓴 <조선창극사>에는 <장끼타령>, <변강쇠타령>, <무숙이타령>, <배비장타령>,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춘향가>, <적벽가>, <강릉매화전>, <숙영낭자전>, <옹고집>으로 적혀 있다. 둘을 견주어 볼 때에, 열 마당은 서로 같고, “관우희”의 <왈자타령>과 <가짜 신선 타령>의 자리에 <조선 창극사>의 <무숙이타령>과 <숙영낭자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왈자타령>과 <무숙이타령>은 이름만 다를 뿐이지 그 내용은 같다고 할 수 있으므로, 하나만 서로 다를 뿐이다. 열두 마당 가운데서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은 사설만 전해지고, <무숙이타령>, <강릉 매화전>, <가짜 신선 타령>은 사설조차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서 오늘날까지 소리가 남아 불리는 것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인데, 이것을 ‘판소리 다섯 마당’이라고 부른다. |
판소리는 조선 왕조 전기에도 불렸을 것으로 짐작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이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판소리 사설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영조 30년인 1754년에 호가 ‘만화’인 유진한이 한시로 적은 만화본 <춘향가>이다. 이를 보더라도, 적어도 숙종 무렵에는 판소리가 틀을 잡게 되었을 것이다. 영조, 정조 때에는 우 춘대, 하 은담, 최 선달과 같은 명창들이 판소리 열두 마당을 불렀던 것 같은데, 그때의 판소리는 길이도 짧고, 사설이나 음악이 소박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순조 무렵에는 ‘여덟 명창 시대’라고 하여 권 삼득, 송 흥록, 모 흥갑, 염 계달, 고 수관, 김 제철(또는 김 계철), 신 만엽, 주 덕기, 박 유전과 같은 명창들이 나서 갖가지 장단과 조를 짜서 판소리의 음악 수준을 크게 발전시켰다. 권 삼득은 설렁제를, 모 홍갑은 강산제를, 염 계달과 고 수관은 경드름과 추천목을, 김 제철과 신 만엽은 석화제를 짜넣었고, 가왕이라고 불리던 송 흥록은 진양 장단과 우조, 계면조를 발전시켜 판소리를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 올렸다고 전해진다. 판소리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승되어 왔다. 전라북도에서 시작되어, 전라남도를 거쳐, 남해로 흘러들어가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의 운봉, 구례, 순창과 같은 곳에서는 동편제가 많이 불렸는데, 씩씩하고 웅장한 것이 특징이며, 송 흥록을 시조로 삼는다. 섬진강의 서쪽인 광주, 나주, 보성과 같은 곳에서는 서편제가 많이 불렸는데, 서편제의 특징은 정교하고 감칠맛이 있다는 것이다. 서편제 가운데 박유전제는 그 시조로 삼고 있는 박 유전의 호를 따서 ‘강산제’라고도 한다. 중고제는 책을 읽는 듯한 ‘송서제’와 비슷한 점이 많은 소리제로서, 소리의 높-낮이가 분명하다.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많이 불렸는데, 염 계달, 김 성옥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판소리가 이와 같이 서너 가지 제로 나뉘어 발전된 것은 여덟 명창 시대에 시작된 일인데, 이것으로써 그때 명창들의 활동이 독보적이면서도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철종 무렵은 이른바 ‘후기 여덟 명창 시대’로, 박 만순, 송 우룡, 김 세종, 정 춘풍, 장 자백, 이 날치, 정 창업, 김 정근, 한 송학과 같은 명창들이 나왔는데, 박 만순, 송 우룡, 김 세종, 장 자백은 동편제를, 이 날치, 정 창업은 서편제를, 김 정근, 한 송학은 중고제를 발전시켰다. 고종 무렵에는 박 기홍, 김 창환, 김 찬업, 송 만갑, 유 성준, 김 석창, 이 동백, 김 창룡, 김 채만, 정 정렬과 같은 명창들이 활약했는데, 이 가운데 김 창환, 송 만갑, 이 동백, 김 창룡, 정 정렬이 ‘다섯 명창’으로 꼽힌다. 이 다섯 명창의 뒤를 이어 장 판개, 김 정문, 공 창식, 박 중군, 임 방울, 김 연수, 이 화중선, 박 녹주와 같은 명창이 나왔으며, 지금은 김 여란, 정 광수, 박 동진, 박 초월, 김 소희, 박 봉술, 한 승호, 정 권진과 같은 명창들과, 고수에는 김 명환이 무형 문화재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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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민중이 구경꾼이 되고, 광대가 연희자가 되어 출발했던 것이라, 솔직하고도 해학적인 인간관과 미의식이 담긴, 서민들의 생활 이야기로 된 경우가 많다. 이 점은 판소리계 소설이 아닌 일반 옛날 소설의 내용이 흔히 충신, 효자, 열녀를 제재로 삼고,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것이 많은 점과 대조가 된다. |
세계의 모든 민족은 저마다 고유한 창법을 가지고 있다. 서양 음악에서 가곡이나 오페라의 발성법과, 우리 전통 음악에서 가곡이나 판소리나 범패의 발성법은 서로 사뭇 다르다. 서양 음악의 가곡이나 오페라 발성법에서는, 이른바 벨칸토 창법이라 하여, 목을 둥글게 열고, 머리와 가슴이 울리게 하고, 배에서 숨을 올려 내는 맑은 소리를 으뜸으로 친다. 판소리의 발성법은, 내는 소리가 통성이라 하여, 배에서 숨을 올려 지르는 것임에서는 서양 발성법과 같으나, 목을 다스려서 약간 거칠고 텁텁한 소리를 질러 내며, 코의 울림보다는 입과 가슴의 울림에 더 힘쓰는 점이 다르다. 음질은 가객에 따라 달라서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서 껄껄한 수리성, 단단한 철성, 밝고 맑은 천구성을 좋게 치나, 되바라진 양성, 발발 떠는 발발성, 콧소리가 나는 비성 따위는 좋지 않은 것으로 친다.
판소리의 발성법을 수련하여 득음의 경지에 이르기는 매우 어렵다. 옛날에는 흔히 깊은 산이나 폭포 밑이나 땅굴 속에서 여러 해 동안에 걸쳐 목에서 피가 나도록 소리를 질러서 수련을 했다. 이렇게 수련을 하다가 목이 상해서 좌절되고 마는 일도 있지만, 그 고비를 넘겨 목이 트이면 좋은 목을 얻게 되는데, 그런 과정을 거쳐 닦은 목이라야 여러 시간에 걸쳐 판소리를 해도 목이 막히는 일이 없다.
서양 음악의 발성법으로 부르는 서양 노래는 시작하는 대로 곧 좋은 소리가 나지만, 판소리의 발성법으로 익힌 판소리는 소리를 시작하여 삼십분이나 한 시간쯤이 지나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게 된다.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판소리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만고강산>, <진국명산> 따위의, 보통 빠르고 평이한 목으로 부르는 단가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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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에 쓰이는 장단은 크게 나누어 진양, 중몰이, 중중몰이, 잦은몰이, 휘몰이, 엇몰이, 엇중몰이가 있다. 이 장단들은 박자, 빠르기, 북치는 법이 서로 다른데, 판소리 사설에 나타나는 한가하거나 긴박한 상황에 따라 느린 것이나 빠른 것을 가려 써서 소리를 엮어 나간다. 북은 가객의 소리에 따라 치는 부분이 달라진다. 가객이 부르는 소리의 악절 첫머리에는 채로 오른편 가죽을 세게 치고, 가객이 소리를 밀고 나갈 때에는 채로 북통의 앞을 조금 세게 치고, 가객이 소리를 달고 나갈 때에는 채로 북통의 꼭대기 오른편 모서리를 가만히 굴려 치고, 가객이 소리를 맺을 때에는 채로 북통의 꼭대기 한가운데를 매우 세게 치고, 가객이 소리를 풀 때에는 왼손바닥으로 북의 왼편 가죽을 굴려 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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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가락의 짜임새나 꾸밈새나 모양새에 따라 지어지는 음악적인 특징인데, 우조, 평조, 계면조, 경드름, 설렁제, 추천목 따위의 종류가 있다. 서양 음악에서 대체로 장조로 된 음악은 기쁘고 명랑하고 씩씩하고 남성적이지만, 단조로 된 음악은 슬프고 어둡고 부드럽고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이렇게 장조로 된 음악과 단조로 된 것이 서로 다른 것처럼, 이들 조도 특징이나 그것이 자아내는 느낌 따위가 서로 다르다. |
역대 명창들이 판소리 가운데서도 저마다 장기로 삼아 부른 것이 있었듯이, 단가에서도 그러하였다. 순조 때의 명창인 송 홍록은 <천봉만학가>를 잘 불렀다고 하는데, 이 단가의 사설이 <수궁가>의 ‘고고천변’대목과 <유산가>따위의 경기 잡가에도 나온다. 철종 때의 명창 정춘풍이 지은 단가 <소상팔경>은 뒷사람들이 즐겨서 많이 불렀으나, 오늘날에는 이것을 부르는 이가 드물다. 고종 때의 명창 박 기홍은 <대관강산>을, 송만갑은 <진국명산>을, 정렬은 <적벽부>를, 김창룡은 <장부환>을 잘 불렀다고 한다. 그 무렵 사람인 백점봉도 단가를 잘 부르기로 손꼽혔다고 하는데, 그의 단가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일제강점기에는 김정문이 <홍문연>을, 임방울이 <호남가>를 잘 불렀다. 이 무렵에 박팔괘, 심상건, 강태홍, 한성기, 오태석과 같은 가야금 명인들이 가야금 병창으로 단가를 많이 불렀다.
단가의 사설은 산천 유람, 인생 무상, 역대 고사 따위가 내용으로 된 가사체로 지어진 것이며, 음악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보통 장단에 대체로 부르기 쉬운 가락으로 짜여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단가는 거의 중몰이 장단으로 되어 있지만, 드물게는 <사창화류>와 같은 엇중몰이 장단이나, <고고천변>과 같은 중중몰이 장단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단가의 가락은 화평한 느낌이 드는 평-우조로 되는 것이 원칙이나, 요즈음 들어 계면조로 된 것이 더러 나왔고, 송 만갑은 평-우조에 경드름을 곁들여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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