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 가로수로 심겨진 은행나무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을 맞이한다. 푸르던 잎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튼실한 씨앗으로 자란 잘 익은 열매는 아스팔트와 인도의 보도블록으로 떨어진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진 종자들은 사람들의 발길에 짓뭉개지고 차량들의 바퀴에 부서지면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흉물이 되어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약 135억 년 전 빅뱅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물질과 에너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물질과 에너지가 등장한 지 30만 년 후에 물질과 에너지는 원자라 불리는 복잡한 구조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원자는 모여서 분자가 되었다. 약 38억 년 전 모종의 분자들이 환원성 대기와 결합하여 특별히 크고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 세포가 되었다. 생물이 탄생한 것이다.
은행나무는 고생대(Paleozoic Era 5억8000만 년 전부터 2억5100만 년 전까지의 지질시대) 말기에는 7속 수십 종이 있었다. 공룡이 번성하던 중생대-약 2억4500만 년 전 쥐라기와 백악기-에 전성기를 맞아 전세계에 분포하였으나 중생대가 저물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지금으로부터 5680만 년 전-신생대 에오세-부터 3390만 년 전까지 2190년간의 길고 긴 세월에 수십 종으로 진화하였다. 은행나무는 침엽수도 낙엽수도 아니다. 독자적인 계통군을 형성한 은행나무문(Ginkgophta)이라는 독자적인 형태의 식물군이다. 전세계에 1문 1강 1목 1과 1속 1종만 존재하는 식물이라는 말이다. 현재는 동아시아에 1종(Ginkgo biloba)만 남아 있다.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며, 2억4500만 년을 살아낸 생명이다.
단세포가 장기간에 걸쳐서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 영장류로 진화했고, 450만 년 전에는 영장류인 원숭이나 침팬지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거쳐 약 7만 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 종에 속하는 생명체가 좀 더 정교한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생명체는 도구를 사용했다는 호모 하빌리스로, 호모 하빌리스는 두 발로 걸었다는 호모 에렉투스로, 호모 에렉투스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호모 사피엔스로,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타인(구인간)과 크로마뇽인(신인간)이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인 현대인으로 진화해 왔다. 인류는 은행나무보다 2억4000만 년 뒤에 출현한 셈이다.
은행나무는 IUCN 적색목록(국제자연보전연맹 레드 리스트,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지구 식물, 동물 종의 보전 상태의 목록이며, 1963년에 만들어졌다.)에서 멸종위기종(EN, Endangered)에 속해 있다. 도로 가에 수도 없이 줄지어 서 있는 은행나무가 멸종위기종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야생에서 인간의 도움 없이 번식하고 자생하는 군락을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 멸종 위기 지정 이유라고 한다. 은행나무가 쇠퇴한 이유는 기후 변화와 매개동물이 멸종-중생대까지만 해도 은행나무의 씨앗을 퍼뜨리던 매개동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면서, 많은 종 수를 보유하고 극지방을 제외한 북반구 전역과 남반부 일부에서 서식하던 은행나무는 유럽에서는 170만~270만 년 전, 북아메리카에서는 700만~1000만 년 전에 사라져 동아시아 일부로 서식 범위가 축소되었고, 많던 종도 1종(Ginkgo)으로 줄어들었다. 동아시아 일대 인류에 의해서 명맥을 유지하던 은행나무는 지난 100여년 사이 인류에 의지해서 다시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은행나무는 인류가 멸종하면 함께 멸종할 생물종 1순위로 뽑히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로수로 가장 많이 심은 나무이며, 서울을 비롯한 72개 자치단체가 지역을 상징하는 나무로 지목한, 수많은 지역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심고자 했을 때에는 수나무를 심는 것을 원칙-열매에서 풍기는 악취 때문에-으로 하였으나, 은행나무 묘목은 전문가조차 성별 구분이 힘들었고, 굳이 구분하려 한다면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묘목의 암수가 제대로 구분될 때까지 기다리고자 했다면 15년 정도는 키워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적당하게 구분한 묘목을 가로수로 심는 과정에서 암나무가 심어지게 된 것이었다.
은행나무는 생명력이 강해서 가지와 뿌리를 제거하고 몸통만 남은 상태에서도 몇 년간 잎이 돋는 경우도 있다. 역사가 오래된 사찰에 있는 은행나무 고목 중에는 고승이 꽃아 두고 간 지팡이에서 잎이 돋아 자랐다는 유래를 종종 볼 수도 있다. 생명력이 모질게 질긴데다가 공해에 강하고 탄소 흡수력이 뛰어나고 병충해의 피해가 적다는 장점 때문에 가로수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불과 몇 해 전에만 해도 가을이면 잘 익은 은행을 털어가려는 시민들 때문에 지자체가 골머리를 썩인 적도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열매만 주워 간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이웃들 간에 경쟁적으로 가져가려하다보니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훼손하는 경우가 발생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지자체에서 나무에 달려있는 것을 털어가는 것을 금지하고, 획일적으로 수확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은 중금속에 오염된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지자체에서도 폐기물 수집으로 처리하는 실정이고, 대다수의 시민들도 인상을 찡그리며 쳐다보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에서 번성하던 은행나무가 도시의 천덕꾸러기로 적락하였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추운 겨울에도 맨 몸으로 도시를 지키고, 봄이면 초록 새싹들의 행진으로 도시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 넣으며 도시의 공해와 오염된 공기를 정화시키면서 무더운 여름에 녹음을 지켜내던 생명들이 아니던가? 가을이면 황금색 단풍으로 도시를 물들이며 쓸쓸한 10월의 거리를 위로하던 단풍 친구들이 아니었던가?
은행나무의 종자를 받아낼 수 있는 크기의 고깔을 만들어 은행나무에 꺼꾸로 고깔을 씌워주자. 고깔 끝에는 종자들이 흘러내려와 씨앗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주머니를 달아주자.
인류의 오랜 선배이자 마지막까지 함께 해야 할 은행나무에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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