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부산 복음 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 간호 대학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그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도 밭도 없고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그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했다.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했다.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
야밤에 탈출하라고 알려주고는 하였다.
장 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가슴에 묻고 지낸 그는 평생에 걸쳐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진실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이었다.
유엔군과 국군이 평양을 탈환하게 되었을 때,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야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타게 되었다.
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거라는 희망 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길고 긴 분단의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의사 장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가난한 사람도 치료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이 허락한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장기려는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
지켜나갔다.
그는 초창기 복음병원을 운영할 때 모든
식구 수가 많은 직원이 제일 많은 월급을 받았고,
이라며 처음엔 어색해 했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한국의 슈바이쳐,살아 있는 성자’로 불렸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장기려 박사는 1968년‘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라는 표어 아래,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 딴 ‘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한국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대 최고 외과의사였던 그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다.
자기 월급 이상의 수술비가 나오면
평양 시절 때 그의 부인은 남편이 생활비를
의사 가운과 환자복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고...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그 자신은
분단된 조국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부모, 부인,5남매를 평양에 남겨두고
이산가족이 된 그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 권유를 거절했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그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둔 1995년 10월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부산시민상, 막사이사이상, 국제적십자상,
특히 그는 지난 95년부터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청십자병원에서
영세민 10여명씩 진료해 주다가
그해 성탄절 새벽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있다.
임을 자처하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희생과
‘이 땅의 작은 예수’로 칭송 받는 사람이다.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
한점도 부끄럼없이 평생 이웃
미래를 내다 본 의료복지 정책인
그것은 그의 ‘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 했고, 그렇게 살았다.
의사 장기려의 삶은 진실한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주시면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졸업 후 당시 가장 뛰어난 수술 실력을 소유한
자신의 서원대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해
무료 진료소인 복음병원을 개설해 영세민
29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이기도 했던 그는
정작 집 한 채 없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개인적인 외로움을 뒤로 한 채...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한평생 남을 위해 살며
일평생 그리운 북녁 식구들 얼굴 그리며
봉사하다 떠난
장기려 박사님의 삶이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적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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